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라 Jun 08. 2023

해외에 살고 싶다는 건 너의 착각

습관적으로 난 해외에 살고 싶다 생각했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로 가는 문이 닫히고 든 나의 첫 번째 생각.

"와 내 인생은 이제 망했다."

한국에서 사는 게 막막하고 힘들 때마다 도피하던 곳은 '해외 이민'에 대한 나의 꿈과 희망이었다.


그런 생각은 다들 하는 거 아니야? 하겠지만 나는 꽤 오래, 강한 집념처럼 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20대의 끝자락을 달리고 있으니 거의 20년도 더 넘은 유물 같은 마음속 생각이었으니 그 크기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난 그걸 15살의 나이에 시도했었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함께.


초등학교 때부터 유학유학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앞날을 벌써부터 걱정했던 나름 조숙했던 13살의 나는 나 대신 가기 싫다 울며 비행기를 타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며 크게 좌절했었다.

"아직 너는 어리고 여자라서 위험해!"라는 말로 단념시키기엔 난 꽤 진취적인 아이였었다.


결국, 오빠가 유학생활을 마치고 나도 어느덧 중학생이 되며 이제는 내 차례라며 마치 부모님께 티켓을 맡겨둔 사람처럼 유학을 당당히 요구했다. 부모님의 가계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도 않던 철부지 시절의 나는 나의 답답한 한국 학교 생활이 해외 가면 당연히 풀릴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만 살고 있었다.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나는 캐나다로 떠날 수 있었다.

제2 인생의 인생을 찾아 이민을 결심한 우리 엄마의 결단력과 모험심 덕분에.


하지만, 역시나 겪어봐야 진면모를 알 수 있다고. 캐나다에 간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물론 엄청난 자연환경, 중고등학생이 수업이 2시면 끝난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자유와 그렇게 배우고 싶던 연기도 무료로 학교에서 배울 수 있던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 문법조차 잘 모르던 영어 까막눈인 나의 영어실력은 드라마틱하게 늘지 않았으며, 하이틴 영화에서 보던 전학생에게 먼저 다가오는 외국 친구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힘들었고 언어가 자유롭지 않은 부모님을 대신해 갑자기 가장이 된 오빠와 내가 감당해야 하는 부담감과 무게는 엄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삶을 살아냈던 우리 가족 앞에 놓인 건 캐나다 이민국으로부터의 거절레터.

시기가 좋지 않았던 것인지 사기를 당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한 채 급하게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나는 캐나다에서 고등학교도 끝내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돌아와 남들보다 더 힘들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입시라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니 마무리하지 못한 외국생활에 대한 의지가 남아있을 수밖에.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의 힘들었던 적응 기간은 캐나다 가기 전 보다 한국에 대한 반감을 더 크게 만들기도 했다.


아무리 한국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든, 좋은 사람을 만나도 "난 언젠가 해외에서 살아야지"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러한 생각과 마음을 품고 있으니 습관처럼 굳어졌고 당연시되어버렸다.


실제로 캐나다 이후에도 해외로 탈출을 매번 시도했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 해외 고등학교 생활의 로망을 심어주던 아일랜드로 단기 어학연수를 떠났고,

그 이후에는 명확한 이유도 없으면서 노래를 부르던 미국 뉴욕 오피스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낯선 외국인들과 작은 아파트먼트에서 시트콤 프렌즈처럼 살기도 했다.

그 밖에도 유럽, 아시아, 중미 등을 여행 다니면서 해외 생활에 대한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이쯤 되니 주위에는 이미 자유로운 영혼, 해외에 살고 싶어 하는 아이로 불렸고,

나 또한 아무런 의심 없이 그런 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캐나다 워홀을 온 지금 처음으로 자각하게 된 사실.

해외에 살고 싶다는 건 너의 착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