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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ul 01. 2020

"먹여살린다"는 말에 숨은 힘의 불균형

미국 세법에서 발견한 인식의 차이  



2008 년 미국을 강타한 희대의 불경기. 다니던 회사가 인수합병 되면서 정리 해고를 당한 나는 서른 초반에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아직 충분한 경력이 쌓이지 않은 데다, MBA 나 박사학위를 소지한 고학력 엘리트도 아니고 자격증이나 전문적인 기술도 없던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암담한 심정으로 신문을 뒤적거리는데 어떤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미 연방 세법 및 회계 강의. 일 년만 고생하면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남은 돈을 털어 학원에 등록했다. 상황이 절박한 만큼 필사적으로 공부했던 시기였다. 오늘은 그때 세법 강의에서 배운 것 중 한 가지를 사용해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미국에서도 개인 세금보고를 할 때 나 부부의 수입과 지출, 그리고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자녀들에 대한 사항을 기입하게 된다. 요즘은 비전문가도 혼자 세금 보고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와 있어서, 굳이 회계사와 상담해야 할 특이 사항이 없는 사람들은 집에서 인터넷으로 간단히 보고하기도 한다.


이때 많은 한국 사람들이 혼동하는 항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배우자를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 남편들이 Spouse (배우자)를 Dependent (부양가족 즉 피부양자) 항목에 기입해야 하지 않냐고 물어온다. 아내가 전업 주부라면 수입이 없으므로 당연히 남편의 Dependent 일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연방 세법에서는, “배우자는 부양가족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미국 국세청인 IRS에서 발행하는 안내 책자 501 호의 11 페이지 내용이다;

“Your spouse is never considered your dependent. But you can file as married filing jointly even if one of you has little or no income.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even if one of you has little or no income”이다. 부부 중 한쪽만 돈을 번다고 해도 수입이 없는 배우자를 dependent로 분류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배우자는 “동반자/파트너”이지, “피부양자/ 딸린 식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쌍방 간에 의무와 권리가 동등한 무게임을 의미한다. 부부라는 관계를 정의하는 데 수입 여부를 아예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발상. 남편과 아내를 대등한 선에서 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표현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같은 발상은 신선한 충격이기까지 하다. 돈을 벌고 경제를 책임지는 사람이 당연히 집안의 가장이고 캡틴이어야 한다는 인식의 이면에는, 돈을 벌지 않는 사람은 가정의 리더 역할을 할 수 없으며 가장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라는 개념이 숨어 있다.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발언권도 적고 (돈을 벌) 능력이 없는 존재로 간주되며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에서 “부양(扶養)하다”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 생활 능력이 없는 사람의 생활을 돌보다


살림하며 아이를 키우는 아내가 정말로 생활 능력이 없어서 남편에게 얹혀살고 있는가? 만약 그렇게 믿고 있다면, 당신은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 꼭 회사에 나가 돈을 벌어 오는 것만이 생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의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오직 돈 버는 일뿐인가?


가정이라는 공동체는 정지된 개념이 아니다. 강도 높은 노동이 투입되어야만 유지되는, 고도로 역동적인 삶의 현장이며 치열한 일터다. 사람은 끊임없이 먹고 자고 싸고 입어야 되는 존재이며,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며 매 성장 단계마다 각각 다른 필요와 돌봄을 요구한다.  집이라는 거주 공간 역시 끊임없이 치우고 닦아주어야 하는 존재다. 우리가 입는 옷도 하루만 지나면 더러워진다.


의식주 외에도 사람이 매일 반복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은 너무나 많다. 일일이 종류를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가정 하나를 꾸리기 위해서 이처럼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하고, 누군가는 집과 그 안에 사는 구성원을 낳고 돌보고 길러야 한다. 이처럼 High-maintenance 가 필요한 것이 가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부가 각자의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돈을 벌어오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덜 중요한 일이 아니며, 돈을 벌어온다고 해서 더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부부 중심이던 생활은 180도 변하여 자녀 중심이 된다. 그렇게 소중한 자녀를 양육하는 “주 양육자”인 엄마의 역할은, 금전적이고 경제적인 필요를 제공해주는 남편의 역할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처럼 무의미한 겨룸이다. 양쪽 다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관계는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먹여 살리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며 상생하는 관계라고 해야 정확하다. 하는 일의 종류와 장소가 다를 뿐.


일전에 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사장님에게 인사를 하면서 사모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었더니, 그분의 대답은 이랬다. “집사람이요? 집에서 놀아요.”


이들 부부는 아이 셋을 기르고 있었다. 사장님도 아침 일찍부터 장을 보고 가게 문을 열고 주방과 홀을 오가며 눈코 뜰 새 없이 일하실 테지만, 아내 역시 식구들을 먹이고 갖가지 일들을  처리하느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분주할 것이다. 큰 아이 둘은 학교에 가지만 막내는 아직 어린 아기다. 아기 데리고 장 보고 저녁 준비하면서 동시에 청소 및 온갖 집안일들을 총체적으로 하느라 사장님 못지않게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을 터인데, 집에서 “논다”니…


아내가 가게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 살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집에서 논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얼마나 집안일과 육아를 안 해 보았으면,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걸 노는 거라 여기겠는가. 짐작이 갔다.


Dependent의 뜻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 A person who relies on another, especially a family member, for financial support. (다른 사람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는 사람, 주로 가족 구성원)


미국 세법에서 말하는 Dependent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자녀”를 말한다. 미성년의 입양자녀 (adopted children), 보호 자녀 (foster children), 손주 손녀, 증손 주손녀 가 포함되며, 성인이 되었더라도 일하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자녀라면 dependent 가 될 수 있다. 배우자는 아무리 돈을 벌지 못해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 아내가 하루 종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편이 벌어온 수입을 오직 아내 자신만을 위해서 쓴다면, 남편이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게 맞다. 이쯤 되면 남편이 아내에게 은혜를 베푸는 성인군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식구들의 위생과 건강과 복지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면, 남편이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표현은 맞지만, 처를 먹여 살린다는 것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먹여 살린다는 말은 “나 혼자만 희생하고 고생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다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면 한쪽이 은혜를 베푸는 것 같은 이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혼자 회사를 다니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니다. 같은 시간, 아내도 주부로서 엄마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고 싱글이었다면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어차피 부모에게서 독립하려면 일을 해야 한다. 처자식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이 회사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그 외의 나머지 잔일들은 모두 아내가 처리해준다. 아내가 없다면 아이들 학교는 누가 보내고 픽업할 것이며, 은행 업무나 청구서 관리는 누가 하며, 집밥은 누가 하며, 옷은 누가 제 때 빨고 다려주며,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과 교육을 때에 맞게 알아보고 등록하며, 무엇보다 예쁜 자식들을 누가 10개월이나 배 아파 살을 찢어가며 낳아줄 것인가? 멀티태스킹도 보통 멀티태스킹이 아니다.


이 정도의 노력과 시간을 회사에 바쳤으면 인정받고 승진이라도 했을 텐데. 아이들 키워놓고 나면 경력 단절녀가 되어 사회에 재진출 하기도 쉽지 않다. 가사 노동과 육아는 투자한 시간에 비해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고 경력도 인정받지 못하기에, 아내들/엄마들은 쉽게 주눅이 들고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다.


이십 대 초반에 통역 겸 가이드 일을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연예계 관련 일을 하시는 40대 초반의 남자분인데, 일 년에 한두 번 사업 용무로 미국에 오시면 통역을 해드리곤 했었다. 그분 왈, 아내가 학창 시절에 성적이 우수한 수재였는데 출산 후 건강이 악화되어 집에서 쉬다 보니 계속 아이만 키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기에 답답해서 “자격증을 따든, 다시 공부를 하든, 외국어를 배우든, 너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좀 해 봐”라고 충고를 했다가 다퉜다고 했다.


뭐라도 배워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다. 다만, 그 말을 하기에 앞서, 여태껏 아내가 가족을 위해 해 온 일들을 존중했어야 했다. 현명한 충고를 해주는 척 하지만, 실은 아내가 하고 있는 일 (살림과 육아)는 의미 없고 시시한 일이라고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분도 분명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아빠~” 하고 반갑게 달려와 안기는 아이를 보는 일이 세상 무엇보다 행복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아이를 매일 갈고닦고 관리해주는 아내의 “일”에 대한 처우는 왜 이런 식일까. 그다지도 소중한 아이들을 키워내는 일이라면, 당연히 그 일도 소중하고 대단한 일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종석 : 누나 지금 이러는 거 남편이 알아? 형한테 연락해야겠어.

이나영: 그 사람을 왜 찾아? 이건 내 일이야.

이종석 : 형이 누나 보호자잖아!

이나영 : 보호자라니? 나이 서른일곱에 무슨 보호가 필요해?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사다.


사람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로 다양한 종류의 일이 필요하다. 부부는 각자 자신들의 활동 영역에서 산더미 같은 일들을 처리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 일들은 경중을 가릴 수 없다. 매일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우연히 발견한 어떤 변호사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아내의 가사 노동은 도우미로 대체될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한 단순 노동이다.”


실명은 거론하지 않겠지만, 지식인의 입에서 서슴없이 나온 무지한 발언에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변호사는 과연 자신의 어머니에게, “어머니, 당신이 평생 해온 일이 너무나 하찮은 단순 노동이라서 가사 도우미가 대신해 주었어도 되는 일이었네요.”라고 할 수 있을까? 가사 도우미가 자신에게 아내 노릇도 해주고 아이들에게 엄마 노릇도 해주나? 그러려면 대체 얼마의 월급과 보너스를 지급해야 할까? 아빠/남편이 돈 버는 기계가 아니듯, 엄마/아내도 무능력한 피부양자가 아니다.


한 시대를 반영하던 단어나 표현들도 시대가 변하면 얼마든지 생성/소멸할 수 있다.


2017년, 법적으로 “근로자”라는 말을 “노동자” 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무엇이 다르기에 그럴까?


노동자 : 사용자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생산자.

근로자 : 사용자에게 종속된 개념의 근면한 노동자.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노동법이다. 노동법 존재의 이유가 갑과 을 간에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것인데, 을에게만 부지런히 일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근로”라는 단어는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발의된 법안이다.


더구나 근로라는 단어 자체가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면서 조직한 “근로정신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근로”라는 단어는 일본 노동법에서도 삭제된 지 오래된 일제 강점기의 유물이다. <강희원의 노동 헌법 참조>


그렇기에, 힘의 기울기를 내포하는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 는 표현 또한 이제 청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우자 (配偶者)의 한자 뜻을 보면, 짝 배, 짝 우이다. 즉 배우자란 서로에게 짝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부가 손을 잡고 나란히 짝꿍처럼 걸어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살림하는 아내는 남편의 돈을 “가져다 쓰는” 사람이 아니라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노동을 인정해주고 서로 고마워하면서, 조화롭고 아름다운 협업을 통해 가정이라는 하나의 완전체를 일구어내는 파트너이다. 전업 주부냐 워킹맘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주부는 주부대로, 워킹맘은 워킹맘대로 애환이 있다. 워킹대디에게 그만의 애환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땅의 모든 전업주부들에게.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을 당신들이 나는 몹시도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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