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루리 작가의 <긴긴밤>

여러 책모임에서 루리 작가의 <긴긴밤>을 꼭 읽어보라는 추천을 받았다. 기회가 닿는 대로 읽어보고 싶었으나, 일정에 밀려 여의치가 않았다. 얼마 전에야 비로소 짬을 내어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게 되었다. 손에 잡은 날, 앉은자리에서 순식간에 다 읽었다. 짧은 이야기와 그림 속에 잔잔하게 다가오는 감동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추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020년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작인 <긴긴밤>은 어린이에게도 재미있게 다가가겠지만, 오히려 인생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한다는 점에서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루리는 <긴긴밤>과 함께 비룡소 황금도깨비상을 받은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를 동시에 세상에 내놓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작가다. 이름은 외국작가처럼 보이지만, 한국 작가다. 본명은 이루리라고 한다. 작품 속에서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문체와 작가 특유의 밀도 높은 그림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강렬한 힘을 보여준다.


<긴긴밤>은 멸종해 가는 코뿔소와 극한의 상황에서도 생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펭귄의 아름다운 연대를 그려낸 작품이다. 어린이문학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삶의 본질적인 고독과 상실,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존엄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오히려 성인 독자에게 더 묵직하게 다가가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라나 스스로를 코끼리라고 믿었던 코뿔소 노든이 있다. 노든은 코끼리들의 배려 속에서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지만, 결국 자신의 앞날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또 다른 자신인 코뿔소가 되기 위해 야생으로 나선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세상은 행복만큼이나 가혹한 고통이 작열하는 곳이었다. 인간의 탐욕과 전쟁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잃고 홀로 남겨진 노든은 동물원에서 만난 펭귄 치쿠와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 그 여정의 끝에서 노든은 치쿠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어린 펭귄과 조우하게 된다. 코뿔소와 펭귄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두 존재는 서로의 입김으로 긴긴밤을 녹여내며 파란 지평선 너머에 있을 바다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들의 여정은 단순한 이동을 넘어 '나'라는 존재를 증명해 나가는 숭고한 과정이다. 작품 속에서 노든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어린 펭귄에게 건네는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라는 말은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준다. 또한 누군가가 가까이 있을 때 나는 냄새와 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통찰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윔보와 치쿠, 그리고 노든으로 이어지는 희생과 헌신은 이 모든 여정이 결코 우연이 아닌, 수많은 기적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사랑의 연대임을 증명한다. "우리가 서로의 옆에 서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된다.


이 책은 지금 홀로 외로움에 휩싸여 '긴긴밤'을 견뎌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나,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내고 상실감의 웅덩이에 빠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어른들에게는 "그만하면 충분히 애썼다"는 따뜻한 위로를, 이제 막 넓은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아이들에게는 단단한 용기와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비록 우리 삶이 별이 비치는 더러운 웅덩이 같을지라도, 그 안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내어 자신만의 바다로 담대하게 뛰어들 용기를 준다.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생명의 존엄과 사랑의 연대는 책장을 덮은 후에도 독자의 마음속에 긴 여운과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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