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비용
굳이 지불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기억력 감퇴와 순발력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지불하게 되는 비용. 여행을 계획할 때 신발 밑창쯤에 꼬깃 접어 반드시 얼마쯤 넣고 다녀야 할 비용.
내 나름대로 정의한 바보 비용이란 주로 여행 예산 항목 중 하나였다. 긴장을 늦추는 순간 사용하게 되며 거의 99%의 확률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경험하고 난 후에야 '참 다이내믹한 여행이었지.' 두고두고 웃음거리 혹은 추억거리가 되는 에피소드와 맞바꿀 비용으로 미리 찜해둔 비용.
버스를 놓친다거나 시간표를 잘 못 본다던가 하는 일은 왜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건지, 심지어 내비게이션이 분명 국경을 넘을 때마다 시간이 달라진다는 걸 미리 알려 줬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기계가 사람의 똑똑함을 쫓아오려면 아직 멀었다. 안 그래?' 하하하 웃다 입장 시간을 놓쳐 친구들의 돈까지 모두 날려 버린 적도 있다.
'미리 사둔 입장권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바보 비용을 지불하였습니다.'
숨이 턱에 차 오를 때까지 뛰었지만 가까스로 버스를 놓쳐 택시를 탔는데 엉뚱한 곳으로 간 택시 때문에 다시 내려서 버스를 타게 된 기막힌 운명 하며,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 각종 물건들까지 그 스토리들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황당한 기록들. 하지만 이상하게 여행이라는 특별한 이벤트에 홀려 그랬다고 변명을 해보자면 또 이상하게 큰 자책감 없이 납득이 되곤 했었다. 아직 어색한 사이에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 안주거리로 쓸 수 있는 바보 비용 경험담은 꽤나 유용하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제 값을 잘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하게 바보 비용의 범위가 일상에 불쑥 침투하여 나의 지출 내역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바보 비용이라고 명명하고 나니 더욱 종류가 다양해졌다.
몇 시간 동안 최저 가격을 검색하다가 몇백 원을 아꼈다고 자축하던 찰나,
왜 광고로 뜬 수십만 원짜리를 6개월 할부로 충동구매하는가?
이제는 SNS 계정보다 더 골똘히 들여다보는 각종 식품 앱들, 배달 앱들. 밤만 되면 호르몬이든, 정신력이든 이성의 끈을 나약하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게 분명해진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쇼핑 리스트에 곱창, 치킨, 떡, 디저트류 찾아 장바구니에 넣고 알뜰하게 쿠폰 할인까지 받아 결제를 한다. 곧이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곤약밥과 제로 칼로리 탄산음료와 닭가슴살 소시지를 함께 구매한다. 누가 바보고 누가 더 바보인지를 겨루는 나와의 싸움, 순간 자책하다가 다시 위로한다. PT안 끊은 게 어디냐며...
또 다른 종류의 바보 비용은 기억력 부족 주의력의 결핍으로 파생되는 것들이다. AA 건전지, AAA 건전지, 동그란 건전지들은 꼭 필요할 때는 없거나 사이즈를 착각해서 잘못 사고, 예전에 사둔 것을 기억 못 해서 또 사고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하고 '아! 이거 집에 있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은 이젠 일상이다. 주민등록증 사진, 여권 사진, 반명함 사진, 명함 사진 등등 잘 못 인화해서 나가는 비용 하며, 깜박하고 잘못 들고 나온 현금카드 때문에 물어야 하는 수수료는 매일 눈뜨고 코 베이듯 사라지고 있다.
여행을 가지 않아도 언제든지 출연하는 바보 비용들 때문에 일상을 사는 것도 항상 주의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큰 맘을 먹어도 무언가에, 누군가에 당하는 일들이 수두룩 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할 것. 호흡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내 주위를 둘러싼 것들을 살필 것. 바보가 바보에게, 바보도 사랑한다지만 여러모로 복잡해진 세상에 긴장한 몸과 마음은 여행을 다녀온 것보다 피곤해진다는 게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