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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Feb 20. 2019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18-12-09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p.28.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누운 채로 한참 눈물을 뚝뚝 흘렸더랬다. 안성평강공주보호소 화재 소식 때문이었다. 겨우 후원금 몇만 원을 입금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요즘 날은 너무 춥고, 길 위의 약한 생명들이 문득문득 걱정되고 마음이 쓰이는데,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끔 길고양이들 마주치면 부랴부랴 먹을 것을 챙겨주는 정도. 별 수 없지, 하면서도 속이 상한다.


오늘은 저녁에 영화 <인생 후르츠>를 보고 왔다. 감히 평가할 수도, 내 처지와 비교할 수도 없는 타인의 삶에 대한 생각은 차치하고,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연과 공존하는 삶? 물론이겠다. 더불어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는(p.28.) 삶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p.28.


전에 없던 버릇(?)이 생겨 요즘은 영화를 보다가 깜빡 조는 일이 종종 있는데, 오늘도 초반에 잠깐 그랬다. - 둘이 합쳐 177살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요즘 자꾸 졸아, 늙어서 그런가 봐, 슬픔!"하고 말하다니, 허허 - 그래도 영화는 무척 좋았다. '집은 인생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오래 살수록 인생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모든 답은 위대한 자연 속에 있다'는 문구들에 평소처럼 괜히 삐뚜름한 표정을 지을 수 없을 만큼. <집의 시간들>도 생각나고, 하동 소보루 민박 회장님 부부도 생각나고, 그러다 또 이 사람, 저 사람 생각이 나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나는 그 사람을, 또 그 사람은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구나, 하고. 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했지만, 아니 노력하는 척은 했지만, 실패하고 만 것이구나, 아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거였구나, 하고.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p.38. 그는 너무나 큰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이해하여본다. 책에서 인용한 책, <슬픔의 위안>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168쪽)' p.40. 그런데, 그걸 몰랐던 것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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