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5
우리는 산책을 한다. 아주 천천히 거닌다. 폴은 발을 가볍게 끌면서, 땅바닥을 잘 짚으면서 걷는다. 그래야 경련이 일지 않는다. 여름 날씨라 덥고, 상쾌한 바람이 분다. 너른 푸른 잔디와 나무에서 바삭대는 이파리들을 보고 폴은 마음 설레한다.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는다. 그는 경이로운 자연에 감탄하며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린다. 강렬하고 빛나는 감정이다. 나는 우리 소설 중 손꼽히는 1929년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p.54.
먼저 용서를 구한다. 누구에게 - 아마도 나에게 - 용서를 구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6월 26일 월요일인데, 지금 쓰는 '책과 아침'은 6월 15일 목요일의 것이다. <파이 이야기>의 작가, 얀 마텔이 한국에 온다는 것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서울국제도서전이 시작하기 며칠 전에야 알았다. 부랴부랴 홈페이지에서 강연 프로그램을 예약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매진. 폐쇄된 공간은 아니니 먼발치에서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겠다는 기대로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 연속으로 서울국제도서전 얼리버드 티켓을 또 부랴부랴 예약했고, 수요일에 혼자서 목요일에는 딸기와 함께 코엑스로 갔다.
- 수요일에 갈 때의 마음 : 사인회도 다른 날 따로 마련되어 있고, 강연 예약도 못했으니 아마 난 안 될 거야, 책은 놔두고 가자, 어차피 또 사 올 텐데...
- 수요일의 실제 상황 : 해서 책도 들고 가지 않았는데 예상과 달리 현장 줄서기로 강연도 잘 듣고, 강연 후에 책 가져온 독자들 대상으로 현장 사인회도 진행하는 바람에 당황했다. 사인을 못 받아서 아쉬운 마음에 돌아오는 길에 출판사 부스에서 이번 첫 내한 기념 특별 합본판을 샀다. <101통의 문학 편지>도 샀다. (목요일에 딸기에게 선물했다.)
- 목요일에 합본판에 사인을 받고 난 뒤의 마음 : 하 내가 왜 그랬을까! 난 왜 이럴까! 멍청이...
- 실제 상황 : 겉으로는 Have a nice time in korea!라고 씩씩하게 얘기해 놓고 얼어서 그랬는지 정신이 없어선지 작가가 내민 손을 뒤늦게 봐서 악수도 못했다. 대신 당황한 듯한 민망한 표정을 봤다. 슬로모션처럼. 올리언니에게 나중에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카톡을 보냈더니 악수도 하고 함께 셀카도 찍었어야지!라고. 음, 뭐랄까, 난 좀 결정적일 때 멍청한 것 같다. 확실히 사회성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도 너무 많다.
이것도 벌써 일주일도 더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에 허리가 아파서 정형외과에 두 번 갔고 주사도 맞았고 꽤 단골이었던 성민 씨의 카페가 집에서 더 가까운 곳에 거의 3년 만에 다시 오픈을 했고 나와 동명인 남자 참석자와 굉장해 보였던(?) 바로크 연주자가 참석한 비발디 사계 듣기 모임에도 다녀왔고 또 조카가 집에 잠깐 놀러 왔었고 조카를 위해 자매님에게 휴롬을 대여했고 드라마 <악귀>가 방영을 시작했고 멍하니 누워서 줄기차게 화면만 쳐다봤다. <보라! 데보라>, <브레이크 포인트>, <내일은 위닝샷>, <사랑의 이해>... 요 몇 달 동안 내가 본 드라마와 드라마 요약 동영상의 재생 시간을 합하면 어마어마할 것 같다. 게다가 허리가 아픈 것은 -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 꽤 충격적인 일이라 안 그래도 너덜너덜한 멘털이 더 바스러졌다. 이렇게까지 쓸모없고 외로운 인간으로 살아도 되나 하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잠 못 들고 누워서 온갖 '생산적일 것 같은' 생각만 하다가 다음 날도 쓸모없이 하루를 보내기를 반복하고 있다.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좀 잘 적어두기만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며칠 전부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이라는 책을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고 있지만 고작 두 챕터를 읽었을 뿐이다. 매일 한 권씩 독파할 수 있을 것처럼 넘쳐나는 시간을 흘려보내고만 있다. 어쩌면 이렇게 밤은 길고 금방 오는지. 장마가 시작됐다. 이력서를 몇 군데 보냈다. 아까는 가게 근처 길고양이 문제로 보사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고양이들도 볼 겸 이번 주에는 언니를 만나러 광화문에 가야겠네.
나 뭐 하고 있는 걸까. 너무 한심하지. 너무 심심하지. 술이라도 마실 줄 알았다면. 대신 커피를 하루에 세 잔씩 마신다. 괜찮다, 안 괜찮다, 괜찮다, 안 괜찮다. 습기를 참을 수 없어서 에어컨을 계속 틀어둔다. 6월마저 지나가고 있네. 무섭다.
씩씩하시네요 / 힘들고 상처 좀 받는다고 안 죽잖아요 / 이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에요
하릴없이 드라마나 보다가 이런 대사를 메모해서 나에게 카톡으로 보내두었다. 아무나, 아무거나 좋으니 나랑 좀 놀아줬으면. 내 얘기 좀 들어줬으면. 그냥 옆에 있어줬으면. 나를 좀 이해해 줬으면. 안아주고 사랑해 줬으면. 아니, 아니다. 그 정도는.
며칠 전에 <고래>의 - 언제 읽어보나 - 작가 천명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나도 몰랐던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 같아서 메모해 둔다. (기사 링크 :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306175951i )
"실패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은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생략) 왜 누군가는 구원 없는 실패담을 읽는 걸까요. 불행을 즐기는 변태적 가학 취미일까요? 그건 우리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구원이 보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책이 훌륭한 작품이라면, 불행에 빠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그래봤자 사랑, 흔하디 흔한 실패, 다 지나가는 인생.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 용서를 빌고 반성을 하고 위로를 하고 다시 한심해지고를 반복한다. 한바탕 운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는 기분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눅눅한 날씨처럼 눅눅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네. 사실은 에어컨 덕분에 코딱지만 한 방은 꽤 쾌적하고 좀 전에 샤워도 해서 보송보송한데. 혹시라도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해져서, 미리 용서를 구한다. 죄송합니다. 아무 의미 없는 손가락 운동입니다. 무시하고 지나가세요.
<파이 이야기>도 좋지만 사실 나는 얀 마텔의 작품 중에 데뷔작인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을 가장 좋아한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 그 다음. 강연 때 듣기로는 신작 두 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하던데 궁금하다. 아, 단테의 <신곡>을 작가도 언급하길래 역시나 하면서 정말, 꼭, 반드시 읽어야지 생각했지만 책장에 우두커니. 7월의 목표 : <Devine Comedy> 읽기. 내일의 목표 : 비교적 이른 시간에 눈을 뜬다, 아침을 먹는다, 책을 읽는다. 허리가 빨리 나으면 좋겠다. 그렇든 말든 내일은 테니스 레슨을 가도록 한다. 그만 떠들고 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