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넷, 혼밥도 안 해본 내가 파키스탄에서 살아남기 2

파키스탄에서의 시간이 가르쳐준 것들

by 꼬마거인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네.


나의 2023년은 봄을 쫓아서 쉬지 않고 돌아다녔던 해였다.

그리고 이 구절처럼 봄은 늘 내 발치에 있었음을 깨달았던 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봄을 찾기 위해 헤매었던 지난 시간들이 결코 후회되거나 아깝지는 않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당연하던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란 말처럼 지난해의 정처 없음은 스물넷의 나에게 꼭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익숙한 것들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스물다섯이 되기 위하여.


스물넷의 나는 그 어떤 해보다 많이 울었고 종종 외로웠고 가끔 서러웠으며 때때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랬기에 스물넷의 나는 그 어떤 해보다 많은 걸 보았고 깨달았고 배웠으며 성장했다.


첫 해외생활, 첫 파키스탄, 첫 직장, 첫 독립과 같은 큰 사건들에서부터 혼자 비행기 타기, 닭볶음탕 끓이기, 명절날 집에 선물 보내기, 자매끼리 여행 가기, 보고서 작성하기, 홈페이지 만들기, 책 출간하기 등 자잘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익숙해진 수많은 처음들을 지나왔다.


문서 작성 시 통일해야 하는 문체, 보고서 작성 형식, 현지 직원들과의 소통방법, 상사와 식사하거나 차를 탈 때 앉는 직급별 위치, 술자리에서의 예의, 음식 주문하기, 불편한 제안 핑계 대고 거절하기, 업무 진행 현황 보고하기, 회의의 진행 흐름, 국제개발협력사업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 공무원 사회의 문제점, 파키스탄의 국민성 등 크고 작은 것들을 보고 배웠다.


눈에 보이는 것들 이외에 무엇보다도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한없이 멋있게만 보였던 언니 오빠들의 어린 일면에는 나와 같이 성숙해지려고 애쓰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성장하기 위해 지금 너무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됨을 배웠고
존경하는 상사에게서 보게 된, 존경할 수 없는 모습이 주는 괴리감에서는 존경스럽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좋은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을 분리해서 받아들여야 함을 배웠으며
마냥 고상할 것 같던 이들의 입에서 뱉어지는 추잡한 내용물에서는 사람을 겉 허물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이유를 배웠다.

때로는 쏟았던 시간과 노력보다도 어떻게 포장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설령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 이유가 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수 있음을,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며 스스로에게 떳떳했던 시간들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배웠다.


좋은 사람은 모든 이들에게 맞춰 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그릇에 맞는 수준 안에서 주변이들을 챙길 줄 아는 사람임을 배웠고,
완벽하게 해내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든 끝을 보는 것임을 배웠으며
국제개발협력사업에 필요한 자세는 내가 입히고 싶은 옷에 상대를 구겨 넣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취향의 옷을 같이 골라주는 것임을 배웠다.
살아가는 모양은 전부 제각각이고 거기엔 이렇다 할 정답도 오답도 없음을, 그렇기에 누군가의 삶을 따라 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음을, 그저 각자의 모양껏 살면 되는 것임을 배웠다.


더불어 수많은 다짐들을 가슴속에 쌓았다.
호의가 계속되면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매번 잘해주면 호구로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호의를 베풀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사람들에게 친절할 것을 다짐했다.
일이나 주변 지인들의 안부보다도 이제는 스스로의 안부를 가장 우선순위에 둘 것을, 나를 더욱 애틋하게 대할 것을 다짐했다.
이곳에서의 나는 나의 편이 아니었던 적이 더 많았지만​ 2024년에는 더 자주 내 편이 되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나온 과거의 미련과, 먼 미래의 희망에 눈이 멀어 내 발치에 있는 행복을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고급 요리를 먹는 걸로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친구들과의 시시한 연락 몇 번, 가족들이 보내는 사진 몇 장에 꽃이 피고 봄이 온다는 것을 이젠 너무도 알기에.

이곳으로 떠나던 날 비행기에서 읽었던 친구의 편지처럼, 비로소 봄과 함께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