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세는 꽃

생명과학도가 농대생이 되기까지

by 꼬마거인

나는 농대 편입생이었다.

나의 롤 모델은 전적 대학에서의 내 지도 교수님이다.

편입해 놓고서 롤 모델로 전 대학교수님을 얘기한다는 게 누군가에게는 우습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편입을 결정하게 된 것 역시 지도 교수님을 뵙고서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막연히 생명과학자를 꿈꾸던 나는 생명과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주위에서 꿈이 뭐냐는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생명과학자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저 오랫동안 내 꿈이라 여겼기에 이 길을 택하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불확실함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지닌 채 대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중 지도 교수님의 수업을 듣게 되었다. 벼 종자 연구를 하시던 교수님께서는 식물이 얼마나 매력적인 생명체인지 얘기해 주셨다.

식물이 어떤 호르몬을 만들어서 환경 스트레스에 저항하는지, 세포 자살을 통해 자신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고 어디에 이용하는지를.

식물은 그들의 전력을 다해 생존해내고 있었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리스크를, 그 어떤 생명체보다 치밀한 메커니즘을 만들어냄으로써 극복해내고 있었다.

외적 요인에 의해 모든 게 결정되는 유약한 생명체라고 생각하던 내게, 교수님의 강의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는 식물의 유연하지만 강한 모습에 매료되었고, 매주 한 번 있는 교수님의 수업이 기다려졌다.

내게 특히 인상 깊게 남은 강의 내용은, 춘화처리에 대한 얘기였다.

특정 식물들은 일정 기간 저온에 노출되어야 이듬해 봄에 정상적으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한다. 그 식물들은 스스로 저온에 노출되었던 시간을 헤아려서 꽃을 피울 시기를 결정한다. 그렇기에 저온에 오래 노출되어 있던 식물일수록 다른 식물보다 더 빨리 개화하게 된다.

추위를 피해 겨울 동안 따뜻한 실내로 들여놓는다면, 봄에 정상적으로 꽃을 피우지 못한다.

그저 순리대로 봄이 되면 당연히 꽃이 피는 것이라 여기던 내게, 교수님의 강의는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봄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 꽃은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준비하고 인내한다는 것을.

분명 인간과는 다른 점이 매우 많은 존재임에도 식물을 통해 나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교수님이 가셨던 길을 가보고 싶어졌다. 작물의 종자 개량을 통해 어르신들께서 재배하기 편한 품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겼고, 나는 그렇게 농대생이 되었다.

편입하기 전 교수님과의 마지막 면담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교수님께서는 당신이 걸어오셨던 그간의 길을 얘기하시며, 앞으로 네가 어떤 길을 가게 되든 과학자가 되고자 한다면 한 가지를 명심하라 하셨다.

'과학자란 아무도 알지 못했던 사실을 세상에서 처음 발견해 내는 사람이며, 그 자부심 하나로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가는 사람'이라고.

교수님이 하신 말씀 속에는 과학자에 대한 긍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과학자로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 역시 묻어 있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임에도, 교수님의 말씀처럼 막막한 길 앞에서 여전히 불안해지곤 한다. 이 길의 끝에 내가 원하던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강의 시간에 배웠던 꽃을 떠올린다.

오랜 추위를 보낸 식물이 더 빨리 개화하듯, 남들보다 더 길고 혹독한 겨울을 버텨온 이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활짝 피어날 거라고.

언젠가 내가 교수님께서 걸어오신 길 위에 마주 서게 된다면 꼭 한번 말씀드리고 싶다. 당신께서 들려주셨던 짧은 이야기가 흔들리던 제게 꿈이 되었다고.

맞이할 봄날을 기대하며 낯설고 떨리는 길을 걸어야겠다.

조용히 겨울을 세는 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