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을 가치에 대해서
세상은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조류 앞에 직면해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실체는 모호하며 그 정의 또한 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삶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빅데이터를 필두로 한 기술들이 일상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 것이고 이를 통해 기존의 소비행태, 기업의 업무 방식을 포함한 인간의 생활 양식 전반에 유례없이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4차 산업혁명의 모든 기술과 사물, 산업은 점차 하나의 거대한 망으로 연결되고 융합되면서 서로 분리되어 있을 때는 불가능했던 혁신적인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융합과 창조의 현상은 산업의 전반에 걸쳐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산업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한 디자인 역시도 이러한 변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까지 디자인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시각화와 같은 매우 한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에서 요구하는 디자인은 기존의 것보다 훨씬 능동적인 개념이 될 것이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글로벌 기업의 파트너이자 세계적인 디자인 컨설팅 기업인 아이데오(IDEO)는 디자인의 개념을 단순히 심미적 가치의 표현이 아닌 디자인적 사고(Design Thinking)를 통한 창의적 문제 해결 방법으로 새롭게 정의한다. 디자인적 사고라 함은 인간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다양한 경험을 적극 활용하여 인간 중심의 창조적 가치를 도출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디자인 컨설팅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는 까닭은 디자이너가 관찰과 공감에 특화되어 있고, 디자인적 사고가 수치와 통계에 의존하던 기존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비해 소비자의 행동과 욕망을 보다 세심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에 대한 관찰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문제 해결 방식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기획, 개발 단계는 물론이고 고객 경험에 이르기까지 비즈니스의 모든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해석이 점차 힘을 얻는 이유는 4차 산업혁명의 모든 비즈니스가 인간에 대한 보다 세밀한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의 모든 것은 인간과 문화, 가치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세계경제포럼의 회장인 클라우스 슈밥은 4차 산업혁명에서의 모든 기술력은 결국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다양한 분야의 비즈니스들이 하나같이 인간의 삶에 보다 가치 있는 무엇을 표명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가치는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점차 어떤 고정된 껍데기를 잃고 인간의 일상에 스며들고, 과거에는 물리적 차원에만 머물렀던 상품들도 이제는 어떤 의미나 경험이 되길 자처하고 있다. 스타벅스가 판매하는 것은 커피 그 자체라기보다는 스타벅스라는 고유한 감성을 경험할 수 있는 문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스타벅스가 최근에는 축적된 고객의 데이터를 활용하여 고객의 성향을 파악하고 고객에게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로써 고객들은 스타벅스라는 문화를 공유하는 일원으로서 더욱 강한 소속감을 지니게 될 것이다. 에어비앤비는 여분의 공간을 타인과 함께 나누는 이들에게 부가적인 경제적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숙박 시설을 보유하지 않고도 세계 최대의 숙박업체가 되었다. 에어비앤비라는 새로운 질서의 탄생은 견고해 보이던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오늘날 모든 비즈니스는 인간에게 더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파괴적인 혁신이라도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업 간의 영역이나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있고, 고정 불변한 것으로 여겨지던 기존의 질서들은 보다 가치 있는 무엇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만든 새로운 질서 앞에서 허물어진다. 이렇듯 껍데기를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점차 하나의 알맹이가 되는 변화와 창조의 물결은 점차 빨라진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디자이너가 지녀야 할 덕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상상할 수 있는 창조성이다. 이러한 창조성을 위해서 디자이너는 당장 눈앞에 펼쳐진 현상이 아니라 현상 속에 감춰진 본질적인 가치를 통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이 속도의 시대가 이룩한 산업적 풍요는 시대를 초월하는 본질적 가치에 대한 통찰력을 빈곤하게 한다. 이제 사람들은 보다 혁신적인 성과를 위해 흐르는 빠르고 풍요로운 물결 덕분에 상상하던 모든 것을 다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물결을 벗어난 시간과 가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이 초연결 사회에서 사람들은 디지털로 변환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누리는 편리함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모든 행위는 데이터로 저장되고, 축적된 데이터는 사람들에게 최적화된 정보와 편리한 생활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유효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나 이처럼 4차 산업혁명의 모든 기술이 인간의 삶을 더욱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더라도, 산업은 기술이 제공하는 넘치는 풍요가 인간의 삶을 정말 가치 있게 하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산업 환경의 변화가 더욱 빨라지는 만큼 그 속도에 뒤처지지 않는 것만이 비즈니스의 생존과 도태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는 비즈니스만이 생존할 수 있고, 그러고도 끊임없이 자신의 생존 가치를 증명해야만 하는 이 시대에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잠시 멈추거나 사색하는 행위는 점차 외면받게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멈춤이나 사색의 시간이 없다면 인간은 어떤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창출해야만 하는 기계와 다르지 않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질적 가치는 편리함이나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불행하게도 비즈니스의 생존을 위해서 잠시도 멈추어선 안되고, 매우 짧은 순간에도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믿는 이 풍요로운 시대는 디자이너에게 어떤 멈춤과 사색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깊은 이해를 통해 창조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실현해야 하는 디자이너의 창조성은 점차 빈곤해진다.
하루가 다르게 산업 환경이 급변하고 비즈니스의 창조와 파괴의 순환이 점차 빨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멈춤이 대체 무슨 소용이며, 인간의 복잡한 욕망을 파악하고 또 보다 효과적으로 자극하여 성과를 창출해야 하는 디자이너에게 사색이 대체 왜 필요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점차 빠른 속도로 흐르는 물결 속에서는 그 물결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파악하기란 어렵고, 기존의 틀 속에서는 틀을 벗어난 창조적 가치를 상상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이때 멈춤과 사색, 관조의 시간은 디자이너에게 그 흐름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에 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디자이너에게 이런 여분의 공간이 없다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창의와 혁신도,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가치의 창조도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말을 즐겨 했던 스티브 잡스에게는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통찰할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이 있었다. 그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에도 모든 분주한 일들을 잠시 중단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선 채 자신과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관조하는 사색적 시간을 갖곤 했었다. 이런 의식적인 멈춤과 사색은 그가 지닌 창조성이 정신없이 흐르는 세상의 물결에 잠식되는 것을 막았으며, 나아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의 행동과 삶을 변화시킬만한 혁신적인 브랜드는 바로 이런 멈춤과 사색의 시간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디자이너가 추구해야 할 창조성 역시도 이와 같다. 디자이너는 단순히 시대가 요구하는 것,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 데이터들이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시대가 추구해야 할 것, 인간이 잃어서는 안될 본질적인 것, 데이터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디자인을 고민해야 한다.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본질적 가치는 바로 이런 고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