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한 숨이 생동하는 한, 육신이 요구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거부하지 못할 여러 육신의 호출이 있다. 이렇게 거대한 의미와 개념을 가진 표상이 아닌, 생활의 한 모습으로 들어가 보자. 편안한 잠에 대한 습관적인 욕구, 느지막한 밤에 찾아오는 허기짐, 새로워지고 싶은 어떤 열망, 누군가 자신을 바라봐주길 바라는 어떤 인정에의 바람이 그 어떤 무언가이다. 다분하게 스며들 수 있는 육신에의 욕구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일화를 들어보자. 베트남의 승려들은 시주받은 것을 거리의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불교란 본디, 인정에 대한 어떤 정언과 같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것, 우리는 잠시 왔다가 어느샌가 흩어져버린다는 것과 같은 자명한 것에 대한 어떤 수용이다. 즉, 그 승려들에게 하루에 꼭 있어야만 하는 육신이 요구하는 식사를 넘어서는 시주는 거리에 굶주리고 나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은 주어지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을 충실하게 낭비하는 것을 원한다. 배부르게 먹었을지라도, 소화를 돕는 어떤 음식이 아니더라도 맛있어 보이는 무언가를 본다면 충실하게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 승려들은 인정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지금 이 상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육신이 명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거부하는 것이다. 언젠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언젠가 이것만 있어도 하루를 충실히 버틸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이 ‘선’인지는 모르겠다. 육신에의 욕구를 충실히 수행함은 어느 정도 참선에 다다를 수도 있다. 그게 자본주의가 할 역할일 수도 있다. 소비를 종용하는 육신의 욕구에 충실히 사는 것이 인간이 바라는 유일한 어떤 것일 수 있고, 그것을 자본이 그럴 수 있게끔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하루에 소비할 수 있는 것은 무릇 정해져 있기 때문에, 견물생심이 올바른 심의 구도로 바뀌게 하는 것이다. 소비하게 하고, 소비는 또 소비를 낳는다. 모두가 참된 욕구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이성에의 욕구는 어떠한가. 만약 모든 것을 알려고 하고, 재단하려 하며 판단하고 싶어 하는 어떤 이성적 체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위에 말한 모든 것은 이성이 판단하건대 참된 욕구이기 어렵다. 생산할 수 없는 인구는 생산 가능한 인간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그러나 육신의 욕구를 충족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더욱이 그것에 충실해진다면 과연 생산할 수 없는 인구가 기댈 수 있을까. 아이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것이 당연해지지 않을까. 신의 피조물로 세상에 내려앉은 이 인간들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모두 사랑받아 마땅하고, 그들은 스스로를 충족시키고 행복해 마땅해야만 한다. 그러니 이성에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거리에 나앉은 아이와 육신의 명령에 충실한 인간을 한데 놓고 그 연결점을 찾아야만 한다. 동물들 중 어떤 동물은 자신의 자식이더라도, 연약하고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이 보이게 되면, 자신이 먹어치우곤 한다. 인간 또한 자신의 육신을 건사하기 위해 그래야만 하는가. 신의 피조물이 신의 피조물을 먹는 괴이한 광경이 펼쳐진다면 그것은 신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아들인 어떤 세상이 아닌, 그 정반대의 시스템적 결과가 낳아진다. 이성에의 욕구와 육신에의 욕구를 타협하고 나면 어떤 출중한 하나의 가치가 탄생하긴 하는 걸까. 지켜야만 하는 어떤 가치를 침해받았을 때, 과연 인간은 얼마나이고 그것을 지키려 할까. 얼마나이고 선택할까. 내부의 가치를 다시 정립하려 한다. 신의 피조물로서 세상에 나앉은 이 인간들이 남김없이 사랑하는 본인의 삶을 사는 것과 자연의 일부로서 세상에 태어난 이 육신들이 충실히 유전자를 공유하는 것 그 사이의 가치를 살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