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파악하는 직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태어났다. 사람의 내면을 통찰하는 신묘한 능력이 아니라 행위와 말투, 표정들을 인지하고 그것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려는 탐구정신에 가깝다. 나만의 방식으로 상대를 해석하는 방법이었다. 이 잣대는 상당히 주관적이라 애정 하는 이에게는 숨은 매력과 장점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불편하게 생각하는 상대에게는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것도 사실이니 '정 없다'는 말도 꽤 듣는다. 사람뿐만 아니라 공간, 사건, 스토리 등 해석의 원료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나만의 분석을 펼쳐간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만큼 힘든 것도 없다. 나름대로 증거를 모으고 조합하여 원인을 찾아보고 또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새로운 현상을 이해하는 일련의 과정을 즐기는 편이다.
현상과 사람을 마주하는 방식을 구축하면서 나는 퍼실리테이터가 되었고 또 기획자가 되었고 나아가 아키비스트가 되어간다.
누군가를 면밀하게 이해하는 과정은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 사람에게 갖는 나의 호기심과 애정이 동기를 유발하는 핵심 요소라는 전제 하에) 대놓고 집중탐구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서사를 마주하는 기획을 시작했다.
얼마 전 내가 정말 애정 하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의 손에서 자란 나였다. 할머니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만연하기에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다가가는 시도는 그가 떠난 후에야 후회와 함께 시작된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본가에는 나의 방이 사라지고 집에 갈 때마다 나는 할머니방에서 지내야 했다. 처음 이 기획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할머니 방에서 만났던 그의 흔적이었다.
당시 할머니는 요양원에 머물렀다. 할머니의 치매는 조금씩 증상이 심해지면서 기억을 지워갔다. 어김없이 그가 없는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는데, 김박스였다. 왜 1인분 조각 김뭉치를 포장하는데 포함되어 있는지 모를 그 플라스틱 김 박스 말이다. 그 작은 박스 안에는 플라스틱 박스와 함께 내장되어 있는 방부제가 쌓여있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20여 개가.
그는 왜 방부제를 모았을까?
정말 궁금했다. 포장지를 뜯는 것으로 모든 역할을 다한 방부제를 왜 가득 모아놨을까? 평생을 아껴 써온 할머니였지만 그는 필요가 없는 것까지 버리지 못하는 맥시멀리스트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포장지는 버리고 방부제를 깜빡하는 허당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왜 방부제를 버리지 않았을까? 다분히 의도가 담겨있음에 그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방부제는 그의 머리에서 지워졌고 그의 은밀한(?) 수집행위는 가장 풀기 어려운 질문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여든으로 접어든 이후, 몇 번의 엉덩방아를 찍은 이후 그는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더군다나 치매까지. 신체의 기능을 조금씩 잃어가고, 머리는 기억하기를 거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그는 방부제를 모았더랬다. 어떤 의도인지는 알 방도가 없지만 내용물을 썩지 않게 만들어주는 방부제가 던지는 의미는 꽤 심상치 않다. 힘을 잃어가는 두 다리를, 기억을 잃어가는 머리를, 노화를 조금이라도 늦추려 방부제가 필요했을까?
물론, 그냥 버리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의미부여는 손자인 내가 할머니를 다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짜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작은 방 안에서 느꼈던 불안과 걱정에 공감하기엔 충분하다.
그가 얼마 전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방부제에 담긴 거룩한 의미는 사실이 되지 못한 해석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버리지 않고, 수집하는 행위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스토리와 맥락이 담겨있다. 수집가들이 의도적으로 소장가치를 위해 모으는 수집이 아니라 버리지 못하고 의도하지 않게 쌓여있는 물건들에는 개인의 서사가 녹아들어 있다. 그 수집된 물건들 그 자체가 개인의 서사이기도 하고.
그 서사를 듣기 위해, 한 사람의 집요함을 듣기 위해, 또 그것을 새로운 의미로 전달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PROJECT. ZIP. "수집으로 사람을 보다: 00展"
우리에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삶은 수많은 작용과 반작용으로 요동친다. 끊임없이 변하는 역동성 속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토템처럼 한 켠에 고이 모셔둔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것은 추억이고 기억이고 습관이다. 혹여 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외장하드에 저장해놓는 기억의 촉매이기도 하고.
그 수집품들로 우리가 대화나 관계로는 알지 못했던 핵심 코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사람의 이야기를 좇아가다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을 만난다. 평범하면서 공감가는, 또 우리가 자주 놓치는 그런 것들.
다행히 우리는 모두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모으는 것들도 있다. 모든 사람들을 수집가라 부른다.
이 프로젝트는 버리지 못하는 것들, 모으는 것들로 전시를 큐레이팅한다. 구체적인 스토리를 짜고 온라인 전시장도 운영한다. 수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영상도 찍는다.
.ZIP은 압축파일의 확장자다. 이 프로젝트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로 묵혀두었던 본인의 이야기와 수집품들을 만나는 작업이다. 의외로 달콤하고 사려깊은 시선으로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 할머니가 남긴 따뜻하고 찬란한 유산 때문일까?다양한 형태의 라이프스타일을 감각하는 또 다른 수집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켜켜이 쌓아 판단이 아닌 공감으로 사람과 마주하는 노력들이 퍼져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