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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2025년 5월 셋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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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1160560589.jpg 어크로스

부장의 주식 차트


부장이 술을 한창 먹다가 주식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처(와이프)를 볼 면목이 없다." 화면이 온통 파란불이었다. 수십 %씩 수직낙하하고 있는 그래프가 보였다.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 부장이 한 마디를 더 얹었다. "트럼프 입을 꿰매어버리든가 해야지.." 그제야 나도 웃었다. 하긴. 그랬으면 내 나스닥 주식도 손해를 좀 덜 봤으리라.


아시아 동쪽 끝, 대한민국 서울 뒷골목에서도 등장하는 이름 '트럼프'. 그는 참으로 논쟁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외교/안보 연구원에서 인턴을 할 때도 그랬다. 나름 국립외교원부터 외교부까지 거치신 높은 분들을 모실 때였다. 그런 분들이 회의 도중 트럼프 얘기만 나오면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취재를 온 기자들의 물음에, 대답보다 손을 먼저 내저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바로 그 트럼프를 작정하고 까는 책이다. 하버드 대학 정치학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집필 의도는 이렇다. '트럼프 당선 이후, 전통적으로 견고하다고 여겨졌던 미국 민주주의의 잠재적 취약성에 대한 우려가 고조됐으므로..' 이런 완곡 어법은 내 취향이 아니니까 잠시 접어두도록 한다.


트럼프의 문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결론까지 책의 서문(6-16pg)에 모두 압축설명돼 있다. 사실 그 이외에 더 이상 첨언할 말이 별로 없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그 10pg만 보면 레비츠키-지블랫 콤비(이하 레지 콤비)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조금 추가하자면 이렇다.


아 적당히 하라고 좀


이 책을 관통하는 질문은 100pg가 넘어야 나온다. 우리의 레지 콤비는 말한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어왔던 그 '민주주의'를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정말 안전한 걸까?'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민주주의 제도는 과연 그렇게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인가? (123pg)


그래서 레지 콤비가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미국 민주주의엔 '가드레일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의 헌법과 문화 속에는 민주주의 붕괴를 막아낼 특별한 장치가 없다. 259pg


미국은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레지 콤비는 나락을 감지했다. '어? 큰일 났는데? 헌법을 잘 살펴보니까.. 우리가 보험을 안 들어놨네!'

미국 민주주의 제도는 여러 차례 위협을 받았으나 매번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민주주의 가드레일은 온전히 유지됐고, '죽음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경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181pg).


그래서 어떤 보험을 들어야 할지를 찾아본 거다. 연구결과, 레지 콤비는 '기본'으로 회귀했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규범의 미학'이다. 즉, 규범을 잘 지켜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봤다. 이때 규범은 '상호 관용''제도적 자제'로 나뉜다.

미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종종 당연하게 여기는 두 가지 규범, 즉 상호 관용가 제도적 자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치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특권을 페어플레이 정신에 입각해서 신중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규범은 미국 헌법에 적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규범이 무너질 때 미국 헌법의 견제와 균형은 우리의 기대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268pg).


'상호 관용'은 익숙하지만 '제도적 자제'는 낯선 단어다. 레지 콤비가 히트를 친 개념이 바로 이 '제도적 자제'다. 넘지 말아야 할 선과 같은 개념이다. 이 책에선 '얇은 관습의 막'이라고 나온다. 쉽게 말하자면 '적당히 해야 한다는 눈치'랄까. '아무리 그래도', '에이 설마', '딱 거기까지' 사이에 있는 것들이랄까.

민주주의 생존에 중요한 규범은 '제도적 자제'라는 개념이다. 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입법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자세 말이다. 제도적 자제는 민주주의 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137pg).
헌법체계가 우리의 기대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절묘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입법부와 사법부는 필요한 시점에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 그 둘은 민주주의의 감시견이다. 입법부와 사법부는 행정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제의 규범이 등장한다. 대통령제 기반의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기관이 그들에게 주어진 힘을 최대한 발휘해서는 안 된다. 자제의 규범이 무너질 때 권력 균형도 무너진다. 그렇기 때문에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권력기관이 그들에게 주어진 제도적 특권을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162-3pg).


자신이 가진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지 않고, 스스로 멈출 수 있을 정도로 참아내는 자제력이 정치에도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현실적인 한계다. '적당히 해야 한다' 거 모르는 사람 없다. 다들 '과유불급'을 알고 있다. 다만 어디까지가 '과(過, 넘칠 과)'이며 어디까지가 '과(寡, 부족할 과)'인지 딱 정해져 있지 않다.

미국 민주주의를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준 것은 헌법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민주주의 규범이다.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 비록 이러한 규범은 헌법이나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진 않지만 시민사회에서 널리 존중받는다. 가정이나 기업, 그리고 대학 운영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은 반드시 필요하다. 131pg


트럼프의 문제 1...2...3...57468...


그 선을 경계구분 없이 뛰어넘은 게 트럼프다. 제 얼굴에 침 뱉는 문장과 단어를 서슴없이 구사하는 하버드 교수들을 한번 구경해 보자.

닉슨 행정부 이후로 트럼프 행정부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멀어져 있다. 미국은 이제 더 이상 민주주의 모델이 아니다. 대통령이 언론을 공격하고 상대 후보를 구속시켔다고 협박하며,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지킬 여력이 없다(261pg).


레지 콤비가 지적하고, 트럼프가 비판받아야 하는 지점은, 바로 그 '제도적 자제'라는 미국 사회의 불문율을 깨트렸다는 거다.

사회적 가치는 세월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대통령의 행동 규범도 그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달라져야 한다. 그렇지만 트럼프 임기 1년 동안 이뤄진 규범 파괴는 전임자들의 경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불문율을 깨트린 대통령은 지금껏 없었다. 트럼프는 민주주의 생존에 중요한 규범을 포함하여 여러 다양한 불문율에 도전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245pg).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문제였던가. 레지 콤비는 4개의 '나락 감지 지표'를 개발했다.

우리는 린츠의 연구를 기반으로 잠재적인 독재자를 감별할 수 있는 네 가지 경고신호를 개발했다.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정치인을 유심히 지켜봐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충족된다면 우리는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31pg).


그리고 그 지표에 따라 여러 상황들이 트럼프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건 '대규모 전쟁'이나 '스파이의 체제 전복 시도'와 같은 대형 악재가 필요한 게 아니다. 사소하게 어긋난 발사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혹은 알면서도 묵인한다면) 멀리 날아가 떨어진 포탄이 엉뚱한 곳에 피해를 입힌다. '정치'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선출된 대중선동가 일부는 독재를 향한 뚜렷한 청사진을 갖고 취임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사실 청사진 없이도 민주주의는 붕괴할 수 있다. 민주주의 규범을 허무는 선동적 지도자와 위기를 느낀 기성 정치 세력 사이에 고조되는 갈등의 결과로 민주주의는 붕괴한다. 붕괴의 과정은 대개 말로 시작된다. 대중선동가는 비판자를 적이나 체제 전복자, 심지어 테러리스트라며 도발적으로 비난한다. 언론인들 또한 이들의 공격대상이 된다. 이러한 공격은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중이 그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독재자는 그들에 대한 탄압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다(99pg).
선출된 독재자는 심판을 포획하고 정적을 매수하거나 무력화하고, 게임의 법칙을 바꿈으로써 권력 세계에서 중요하고 지속적인 경쟁력을 확보한다. 그들의 시도는 언제나 점진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전제주의로의 흐름이 항상 경고등을 울리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민주주의가 해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민들은 뒤늦게 깨닫는다. 그 변화가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게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아이러니는 민주주의 수호가 때론 민주주의 전복의 명분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이다(118pg).


복잡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흔히 미국은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불렸다.

미국 민주주의는 헌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헌법엔 '정당하게 선출된 권력의 폭주'를 막아낼 가드레일이 없었다.

(법이 아무리 굳건한들) 이 가드레일이 무너질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이때 가드레일은 제도적 자제와 상호 관용을 뜻한다.

제도적 자제는 '견제'와 '균형'을 모두 지키는 것이며, 상호 관용은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자는 거다.

트럼프는 이 가드레일을 무너뜨렸다.


연상작용


그런데 이런 설명을 듣다 보니, 비단 트럼프만 눈에 밟히진 않았다. 놀랍도록 한 인물이 떠올랐다.


앞선 '4개의 나락 감지 지표'에 한 사람이 어른거렸다.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김영선이 해주라 그랬는데, 말이 많네, 당에서"),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다 잡아들여. 싹 다 정리해!"),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전공의 48시간 안에 미복귀 시 처단") 정치인이.. 눈앞에 있었던 건 아닌가.


트럼프 입을 꿰맬 게 아니라 다른 사람 입을 꿰매었으면, 그랬으면, 부장의 'LG생활건강' 주식은 조금 더 빨갛지 않았을까. '파기 환송', '통정 매매', '동해 심해 가스전'... 이런 단어들은 우리가 몰랐어도 되지 않았을까. '부대 열중쉬어'를 까먹는 대통령에게 기본 규범을 바랐던 건 사치였을까. 내던져진 494번의 '자유'에서 비좁아진 민주주의를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 이렇게나 비좁아진 민주주의가 다시 넓어질 수 있을까. 깊은 자괴감으로 점철된 마무리는 또 처음이다.

작가 E.B. 화이트는 미국 연방정부의 '작가 전쟁위원회'로부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짤막한 답변을 들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화이트는 겸손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답을 내놓았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절반 이상의 경우에서 옳다는 생각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다. 민주주의는 아직 반증되지 않은 이념이며, 타락하지 않은 노래 가사다. 민주주의는 핫도그에 바른 머스터드, 그리고 배급받은 커피에 넣은 크림이다. 민주주의는 전쟁이 한창인 어느 아침에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대답해 달라는 전쟁위원회의 요청이다." 미국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이제 미국 국민은 지금껏 그들의 민주주의를 지켜주었던 기본 규범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규범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해야 한다. 규범이 포괄하는 범주를 넓혀가야 한다(288-289pg).



제목 :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저자 :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번역 : 박세연

출판 : 어크로스

발행 : 2018.10.02.

랭킹 : 사회/정치 부문 14위 [교보문고]

가격 : 15,12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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