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소설가
은희경 작가는 '잔잔한 매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강연 내내 발 디딘 곳에서부터 채 1m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섰다만 반복했다.
말하기의 톤도 조곤조곤했다. 주무시는 관객들도 더러 눈에 보였을 정도다. 심지어는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도 이어져, 듣다가 어리둥절해지기도 했다. "음..? 갑자기..?"라는 말이 나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은희경 작가의 말은 분명 의미 있었다. "우리는 보다 섬세해져야 한다.", "문학은 쓸모없는 것이며, 틀을 깨는 것이다", "지구와 함께 단체 생활을 하는 인류공동체"라는 표현들이 귀에 때려 박혔다.
그것이 위로였다.
스스로 차갑고, 급진적인 작가라 말한다. 그녀가 따뜻한 (어쩌면 따끔한) 위로를 건넨다. 기꺼이 위로받을 텐가. 함께 위로의 온도를 느껴보자.
저는 차가운 작가입니다. 그런데 따뜻한 위로를 하게 됐습니다. 제가 배 타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을 하느라 주제는 아무거나 해달라고 주최 측에 맡겼어요. 그런데.. ‘따뜻한 위로’를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만남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어떤 방식으로 따뜻한 말씀을 드릴 수 있는지 한 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많은 평론가들이 저를 독설과 냉소의 작가라고 합니다. 처음엔 좋았습니다. 제가 쓰려고 했던 방식 그대로였거든요. 저는 가르치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거든요. 다들 너무 가르쳐요. 한국 소설은, 정확히는 근대소설의 역사가 계몽주의에서 시작한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이광수 이런 사람들이요. 읽을 때 뭐라도 하나 얻으려고 하고요. 특히 현대인에게는 그게 기본 태도예요. ‘저 사람이 나에게 이익이 되나?’ 같은 거요.
그런데 사실 문학이라는 것은 특히 소설이라는 것은 쓸모없는 거예요.(웃음) 제가 감히 이런 파격적인 말을 한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김현 문학평론가가 그 말씀을 해주셔서 그 뒤로 많은 작가와 강연자가 인용하는데요.
‘문학은 쓸모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필요해요.
우리는 너무 쓸모 있는 것만 추구해요. 그게 우리의 진짜 본질일까요. 그런 질문을 하게 하는 게 문학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울리는 소설 안 쓰겠다. 조금 더 독해지겠다고 했다고요.
울어버리면 너무 쉬운 해결이에요. 우리는 인생을 정면으로 볼 필요가 있어요. 익숙한 대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 게 맞을까?’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제가 작가가 되기 전에 좋아했던 책이 ‘의심을 찬양함’ 막 이런 베르히트 시인의 시인데요. ‘우리 모두 의심을 해야 한다. 지구를 칠하는 페인트공에게 나를 뺏긴다’라고 해요. 물론 그건 히틀러를 말하는 건데요.
우리 인생에 페인트공들이 있어요. 정상성을 규정하는 거죠.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너는 이걸 해야 해. 너 이거 못해? 그럼 노력해야지.’ 이렇게 너무 많은 규율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그냥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여기 따라야지’ 하거든요. ‘너 상처받았니? 너 위로가 필요해? 글쎄.. 괜찮은 것 같은데?’(웃음)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경제적인 조건을 위해 전략하고,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고요.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으려고 노력하면서요.
그런데 저는 가르치는 세상이 싫고, 너무 감상적으로만 ‘잘 될 거야.’ 이런 무책임한 위로가 싫었어요. 제가 소설가가 되면 저는 이렇게 각성하고 통각을 일깨우는 불편한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결국 ‘냉소와 독설의 작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차가운 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제가 냉소하는 대상이 ‘우리를 구속하는 고정관념, 허위의식’이었기 때문에 제가 냉소하는 건 약자나 소수성이 아니에요. 이 세상 자체가 아니에요. 전 인간을 너무 사랑하고, 다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모든 소설가들이 다 휴머니스트라고 생각해요. 소설은 ‘인간학’이거든요. ‘나는 인간이 이렇다고 본다.’ 이런 말들이잖아요? 그래서 계속 관찰하고 표현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냉소적일 수 있어요.
모든 작가들은 다 휴머니스트고 인간의 편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틀들이 미온적인 위로와 형식적인 따뜻함만을 보였기 때문에 굉장히 객관적으로 보려는 제가 차가워 보이는 거예요.
‘야 화해해.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렇게 미봉책으로 위로만 하다 보면 우리는 오답에 자꾸 적응하게 돼요. 제 나름의 따뜻함을 제 방식으로 문학작품 속에서 구현하고 있습니다.
제 소설을 통해서 그 방법을 말씀드려 볼게요. 일단 제 소설이 다 화해하고 친해지고 위로하는 소설이 되지 않고, 제 인생을 부정하는 소설부터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그런 에너지가 막 나와요.
35살이 되었을 땐데요. 사춘기가 왔어요(웃음). 적응하려고 애쓰는 모범생이었고, 소심했어요. 다수의 가치관 속에서 안전하게 사는 인생이 이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근데 제가 35살 때..
(딴 얘기 시작) 저는 인생을 수행하는 것 같아요. 숙제하려고 태어난 것 같아요. 해야 할 일을 잘 해내야 하고요. 저를 이렇게 소설가로 만든 아주 큰 몫이 독서죠.
제가 그때 읽었던 책 중 하나가 부처님 말씀도 있었어요. 좋다의 반대말은 나쁘다가 아니래요. 괜찮다래요.
우리는 괜찮은 인생을 살아가면 좋은 인생을 가질 수 없대요. 내가 이런 상황에서 만족하지 말고, 내가 원했던 인생이 뭐였는지 생각 좀 해보자 해서 혼자 여행을 갔어요.
(본론 시작) 그 나이에 여행을 가려면, 제가 가진 환경에서 벗어나야 해요. 연년생 아이 2명이 있고, 술꾼 남편이 있고요(웃음).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제쳐두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낸다는 건 굉장히 큰 용기였어요.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도와주셨어요. 저희 어머니는 1933년생이세요. 지금은 안 계신데요. 그 당시엔 개인주의자였어요.
제가 사춘기 때는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았어요. 제가 어렸을 땐 국어시간에 배우는 문장이 어머니상은 ‘찬밥을 잡수시고, 사철 맨발로 희생을 앞장서..’ 뭐 이런 거였어요.
근데 우리 엄마는 너무 이기적이에요. 저희 엄마는 예쁜 걸 좋아해서, 그릇을 사 오고 꽃을 꽂고 혼자 차 마시고 집에서 혼자 화장하시고요. 그 당시로선 형제 12명인 친구도 있었는데, 가족계획으로 2명만 낳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다가 저를 낳았는데요. 둘만 낳으려면 하나는 아들이어야 하는데, 제가 딸이니까 할머니가 방에 불을 안 때준거예요. 10월 말인데요! 어머니가 그 당시로서는 페미니스트셨던 거죠.
이런 세상은 정말 부조리하다 생각하신 거죠. 제 밑엔 남동생이 있는데, 차별을 하지 않으셨어요. 안 시킬 땐 같이 안 시키고, 시킬 땐 둘 다 시키고. 그러니까 동등한 환경에서 개인 차가 드러나잖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영특해서 공부도 더 잘했어요(웃음). 저희 집에선 남동생 불만이 많았어요. 아들 역차별이라고 한 거죠.
근데 어머니께서 아주 진취적인 분은 아니에요. 제가 나중에 운전을 하게 돼서 후진을 잘 못하면 ‘여자가 하면 뭘 하겠어’ 그러세요. 인간은 이렇게 여러 가지 면이 있어요. 여성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보셨지만, 편견도 같이 여전히 갖고 계셨던 거죠.
아, 다시. 30대 중반에 제가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 1990년대엔 ‘애 2명이 있는 아줌마가 뭘 한다고 그래?’ 그런 말이 많았어요. 근데 어머니는 ‘니가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해야지’라고 격려는 해주셨어요. 대신 ‘애를 봐줄게’ 뭐 그런 건 없었어요(웃음). 제가 놀러 가면 손자들부터 안 보고, 빨리 백화점부터 가시는 분이에요(웃음). 어머니가 독립적이시니까 자식들도 독립적이었죠.
‘나는 어떤 인생을 원한 거지?’ 모르겠더라고요. 급한 일이 있으면 빨리 처리하기에 바쁘고요. ‘내 인생이 만족스러운가?’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하려고 여행을 간 거예요.
(딴 얘기 시작)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봐요. ‘문학의 쓸모없음’이 필요한 거죠. 인생을 효용성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해요. 그때 비로소 자기 표정이 나와요. 공원 산책을 하다 보면 운동, 산책 등 다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와요. 어떤 효용성이 필요해서 나오죠. 그런데 제가 어느 날 공원에 보니까 갑자기 다 웃는 얼굴로 한 방향을 봐요. 무지개가 뜬 거예요. 그런 효용성이라고는 없는 ‘쓸모없는 것’들이 나 자신이 되고 나에 대한 그런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틀을 벗어나서 나를 느끼는 순간들이 어쩌면 나라는 본질, 나에 대한 진실에 가깝게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아요. 문학 작품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근본적인 감각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어요.
사실 큰 틀 속에서 적응하라는 생각은, 우리 역사를 바꿔 놓지 못했어요. 인문학적인 생각 같은 거죠. 주어진 상황 가운데 최대한의 효용성을 찾고, 행복한 삶 속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 말고요. ‘결과적으로 행복해졌을까?’하는 인문학적인 생각들 때문에 역사가 발전한 거죠.
누군가가 ‘노예제도는 불평등해! 말도 안 돼!’ 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죠. 사실 투표권은 흑인이 먼저 있었어요. 누구부터 줬냐 하면 남편이 있는 여성부터 줬어요. 물론 백인부터요.
그런 계급적인 편견 속에 있었지만 지금까지 온 거예요. 이것들은 다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철학이나 인문학을 한 사람들이 패러다임을 바꿔놨기 때문이거든요.
우리도 바꿀 수 있거든요. 어떤 각성을 문학작품이나 인문학적인 질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거죠. 저한테 그런 각성이 있는 것 같아요.
(본론 시작) 난생처음 여행을 갔을 때, 가서 뭘 하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틀에서 벗어나서 생각해 보자는 게 있었어요. 1994년도엔 개인 노트북을 갖긴 힘든 시대였어요. 비싸기도 했고요. 대신 한 달에 10만 원으로 임대를 할 순 있었어요. 그야말로 저 자신만을 위한 소비를 한 거예요.
(딴 얘기 시작) 좀 그래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생각의 사생활을 남겨놓아야 해요. 윤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내면의 공간이 있어야 해요. 그게 고독이고, 그게 두려움이고 불안이라 할지라도 그게 나예요.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걸 자꾸 일깨워주는 게 문학작품이고요.
제가 그나마 저 자신일 수 있게 만들어 준 게 저의 일기장이에요. 저는 작가가 됐을 때, 어느 날 아침에 눈 떠보니 유명해졌나요? 그렇게 묻는 분들이 있었는데요.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썼어요(웃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글로 상 받았어요.
남편도 국문과예요. 나보다 똑똑해 보여서 제가 매력을 느꼈죠. 그렇게 글을 많이 읽었으면 약간의 마음속에 ‘내적 거만함’이 있거든요.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내 생각이 다를 수 있잖아요. 근데 그런 사람들은 생활적으로 강하지 않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기 쉬워요(웃음). 저도 그게 뭔가 다른 걸 찾아보려는 제 오랜 독서와 글짓기에서 나왔던 것 같아요. 일기는 저 스스로를 보는 거니까요.
사실 일기는 매일매일 쓴다거나 검사받는다면 그건 진짜 일기가 아니죠. ‘너무 화가 나, 부당해, 즐거워, 새로운 걸 알게 됐어.’ 그렇게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쓰는 거예요. 내 감각과 내 사고와 내 일상에서의 새로운 느낌을 쓰다 보면 ‘나’라는 사람을 안 놓쳐요.
저는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게 일상에 함몰돼 있고 그래도, 저 스스로를 놓지 않았어요. 책도 읽었고요. 제가 수유를 하면서도 책을 읽었어요. 수유할 때, 임꺽정 읽었어요. 힘든데 재밌는 걸 읽어야죠.
읽다 보면 ‘내가 이런 사람이야? 내가 이렇게 치사한 사람이야?’ 싶을 때도 있고요. 독서가 객관화를 하는 과정이잖아요. 내 머릿속을 정리하는 과정이니까 ‘아 내가 지나쳤구나. 내가 이렇게 한 건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됐겠구나.’ 이렇게 스스로를 객관화하거든요.
그래서 제 일기가 격해요. 주로 신혼 때 쓴 일기는 ‘속았다’(웃음). 제가 쓴 명문장이 소설에도 있어요. <빈 처>라는 소설에 나오는데요. 결혼하자마자 결혼 상대가 불성실하니까 이런 독백을 해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화려한 비탄이라도 남기는데, 어찌 이루어진 사랑은 남루한 일상을 남기느냐”(웃음)
그게 다 제 일기장에서 나왔어요. 제 관점들이 일기장 속에 있었던 거예요.
(본론 시작) 제가 여행을 가서 2-3일은 아무것도 안 했어요. 내가 자유롭지 못할까 봐요. 틀 속으로 도로 들어갈까 봐요. 제가 두 아이를 키우는 주부이고, 남편은 직장을 다니니까 일부러 다 반대로 했어요. 먹고 싶을 때 먹고, 늦잠 자고요. 그런 시간 개념부터 다 깼어요.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곧바로 깨달을 순 없어요.
일단 나를 놓아두는 거예요.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35살인데 내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건 뭐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정체성을 막 쪼갰어요.
여자, 딸, 아내(소설 <빈처>), 대한민국 여성. 그러다 보니까 할 얘기가 막 생기는 거예요.
(딴 얘기 시작) 제가 기간제 교사를 했는데요. 한 1년쯤 했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3-4년씩 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해에 학위가 바뀌어서, 정식 교원을 뽑는데요. 다들 설렜죠.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정식 교원은 어디선가 온 남자 선생님들이에요. 거기가 기독교 재단 학교였는데 심지어 ‘이 모든 게 공의의 하나님 뜻’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제가 너무 분노했어요. 평소 35살까지 순응하며 살 때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던 생각이 그 분노로 이어지고 할 말이 생기는 거예요. 왜 숙직실 방석은 여선생님들이 집에서 빨아와야 하는지 등등이요. ‘내가 바뀌어야 한다. 내가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을 땐 분노와 부당함에 대한 질문이 생겨요.
이런 게 따뜻한 위로예요. 이 틀에 맞춰서 살고 있는데도 ‘괜찮아’ 이런 게 따뜻한 위로가 아니에요. 당신이 누리는 것들에서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바라보는 게 따뜻한 위로 아닐까요? 따끔한 위로인가요?(웃음)
어쨌든 저는 그런 위로를 찾고 싶었어요. 순간적으로는 그런 위로가 우리에게 필요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를 생각할 때는, 카프카식으로 말하자면 ‘얼어붙은 내면’을 깨뜨리는 게 문학작품이죠.
저는 여러 서부터 굉장히 기대를 많이 받았어요. ‘너는 법관이 되어라.’ 읍 단위에서 사는 시골 소녀였는데요. 아버지가 ‘너는 그렇게 크게 돼라.’라고 제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거신 거예요. 그 부모님 사랑이 너무 중요해서 잘 보이려고 했고, 그 가치관이 다 제 것으로 흡수됐어요. 이게 사라지면 전 아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요.
결국 법관이 되지 못했어요.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걸 해드리지 못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근데 제가 혼자 생각해 보니까 나는 그런 걸 원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부모님도 실망한 게 아니야. 부모님은 애초부터 자기 위주의 사랑을 주지 않았어야 해. 내가 원하는 걸 존중했어야지.’ 그게 우리 부모님이 나빠서인가요? 아니죠.
제가 생각하는 질문은, 한 사람의 가족관계가 아니라 이런 전통 속에서 ‘왜 질문하지 못하나’였어요. 그런 권위 의식은 우리를 어떻게 억압하는가 이런 게 전 따뜻한 위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막 썼죠.
여성으로서의 나는 어떤가. 외모지상주의 같은 말 중 ‘쟤는 천생여자야.’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칭찬이라고 생각했어요. 책도 보고 각성도 하면서, ‘도대체 ‘여성성’이라는 게 뭐야? 순종적인 것만 여성들에게 그런 역할을 주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남자도 다 자기만의 개성이 있어요. 이들도 수줍을 수 있고, 고유한 개인이잖아요. 전통적인 성역할을 주면 결국 남녀가 모두 상처받는 거예요. 뭐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면 글이 늘었어요.
(본론 시작) 글은 쓸 때 늘어요. 그렇게 단편 소설만 5편을 쓰다 보니까 글이 늘었어요. 그래서 중편 소설을 하나 썼어요. 총 6편을 신촌 문예에 응모를 했어요. 6개 신문사에 넣었죠. 그 해 중편 소설이 당선돼서 무려 첫 번째 응모에 제가 신춘문예 당선 작가가 되었습니다.
(딴 얘기 시작) 근데 저는 어릴 때부터 꿈이 작가였거든요. 초3 때부터 글을 잘 쓴 건 맞죠. 저는 관찰력이 좀 뛰어나요. 기억력도 뛰어나고요.
하지만 너무 고깝게 생각하진 마세요. 전 숫자를 너무 못하고, 고유명사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요. 이제 제가 이제 고유명사 기억 못 할 나이잖아요. 나이 때문이라고 하면 20대부터 그랬다고 남편이 그러던데(웃음). 길 눈도 너무 어두워요.
제가 한 번은 달리기를 했었는데요. 딴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서 앞사람을 놓쳐요. 딴 데로 가다가 저기서 달리고 있으면 다시 죽어라 뛰어가는, 그런 부족한 면이 많아요. 기억력이 많다는 건 잡념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집중해서 해야 하는 건 못해요. 인간은 굉장히 복잡한 존재니까요.
(본론 시작) 어쨌든 그런 걸로 글 솜씨도 있고, 관찰력도 뛰어나서 이야깃거리가 많아요. 그러면 작가가 되나요? 글 잘 써.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이 강해. 이야기도 잘 만들어. 끝? 아닙니다. 못해요. 결정적인 게 빠졌어요.
전 30대 중반에 작가가 됐어요. 문학적 상상력이 없었어요.
문학적인 상상력은 익숙한 걸 다르게 보는 거예요. 물론 그렇게 많은 경험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 결국 뭘 봤느냐가 상상력의 수준을 갈라요. 그때 제가 저만의 관점이 없었어요.
<빈 처>를 예로 들면요. 남녀 역할이 이렇게나 다른가 싶었어요. 연애할 때는 내가 위인 것 같았는데, 결혼하고 보니까 내가 막 사정사정하면서 ‘몇 시에 들어와?’ 체크하듯이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 질문을 한 건 제 인생이 싫었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안정적인 가정에 아이가 두 명이었으니까요. 정상성의 틀이 싫었다는 게 아니라, 그 정상성을 자꾸 실천해 내기 위해 스스로 싫어하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게 싫었어요.
부부라도 각자 자기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가족끼리 비밀이 어딨어, 다 털어놔야지.’ 우리는 나만의 음흉한 비밀이 아니라 ‘그냥 설명할 수 없는’ 내가 있어요. 그때 왜 그랬어? 명명백백하게 얘기하려면 틀에 맞는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가 서로 멀어집니다.
그래서 저는 한 인간으로서, 정상성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여행도 가야 하고, 가족끼리 외식해야 하는 것들이요. 나 혼자 어디 가서 먹고 싶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같이 먹고 싶을 수도 있고요. 꼭 그래야 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지켜내기 위한 억압들이 너무 많아요. ‘너 왜 그걸 억압이라고 느껴? 너 윤리적이지 않는구나’라는 게 틀 속에 있는 생각이에요.
인간은 지구랑 단체생활을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규칙 같은 것들을 더 좋게 바꿀 수 있잖아요. 그게 인문학적인 생각이죠. ‘왜 여자는 결혼하면 이렇게 되지? 왜 규율대로 안 해주지? 성실한 사람만 손해를 보지?’ 그 얘기를 토로하려면 질문을 해야 해요.
문학 작품은 창작이잖아요. 창작은 세상에 없던 생각을 해야 해요. ‘각자 다 자기만의 차별이 있구나, 저건 저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거구나. 왜 노인이라고 해서 그런 욕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렇게 자꾸만 내 관점으로 강요하면 창작을 할 수 없어요. 우리가 틀에 맞추는 거예요. 그 이후를 생각해야 창작이 되는 거죠.
저도 ‘왜 내가 원치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지?’ 싶었어요. 인정받기 위해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그냥 벗어나서 생각해보자 싶었죠.
근데 이럴 수도 있죠. ‘벗어나서 생각을 해봤는데 틀 안에 사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러면 그 생활로 돌아가서 열심히 정상성을 구현하면서 살려고 했어요. 그런 인생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자, 이제 그럼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생각해 보기 시작한 거예요.
신춘문예만 되면 다 작가가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 데서도 청탁이 안 와요(웃음).
우리나라에서 작가 생활을 하려면 잡지나 매체에서 청탁이 와야 해요. 내가 혼자 막 써놓고 글이 많다고 해도 안 돼요. 강연을 막 해도 안 돼요.
그런데 저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믿었어요. ‘장편소설을 써보자!’ 했을 때, 어머니가 불교대학을 다니셨던 연줄로 절에 있는 방을 하나 얻어다 주셨어요. 절에 들어가서 글을 썼어요. 그래서 쓰게 된 게 <새해의 선물>이라는 책이에요. 상금이 그때 당시 2천만 원이었던 것까지 기억나요.
제가 1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았어요. 그 소설이 지금까지의 대표작이에요. 그리고 작가가 된 지 30년 동안 15권의 책을 썼습니다. 첫 소설은 뭐 100쇄까지 찍으면서 독자분들이 많이 읽어서 기쁨이고 영광이죠. 제가 약간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면서 계속 작가 생활을 할 수 있었죠.
하루를 살아가는 제 일상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작가로서의 정체성’이에요. 작가는 퇴근이 없어요. 편하게 있다가도 ‘이런 걸 써보면 어떨까.’ 싶고요. 어떤 캐릭터를 깊이 살펴보게 돼요. 예를 들면, ‘새가 바닷가에 갔는데, 저기서부터는 발자국이 안 보이네? 이게 인생에 대한 비유 같은데?’ 같은 거요. 온/오프 구분이 없죠. 아, 근데 무슨 얘기하다가 여기까지 왔죠?
아 생각났어요(웃음). 그렇게 많은 시간, 좋은 소설을 쓰려고 노력하는데요. ‘30년 전에 쓴 게 제일 낫다고?’ 그런 생각을 할 땐, 약간의 좌절을 느껴요. 근데 개정판을 내려고 다시 책을 읽어봤는데 이해했어요. ‘아 잘 썼네’ 싶어서요(웃음).
그 소설은 내 인생을 틀에 맞추지 않으려는 에너지가 강한 소설이었어요. 소설 안에 질문이 있어요. ‘나랑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고? 이렇게 이상해보이는 사람들과 여러 악조건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해주는 굉장히 직접적인 질문들이 소설에 있었어요, 첫 소설이 가지고 있던 그 문제의식. 그 흡입력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그 소설은..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나요?) 12살 소녀가 주인공이에요. 제가 지금껏 말씀드렸듯, 세상을 바꾸는 소설을 써야 하니까 ‘소녀가 자기만의 관점이 있는 이야기’를 썼어요.
배경은 1969년 전라도 소읍이에요. 생활 조건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세대는 전쟁을 겪은 지 얼마 안 됐어요. 어른들은 전쟁 후유증도 있어요. 경제 개발 시기라서 사회가 막 바뀌면서 신분상승 욕망과 도시로 이동하고자 하는 욕망이 분출하는 시기예요. 하지만 아직도 재래식 화장실과 여러 가구가 우물을 길어서 밥을 해 먹는 사회예요.
그러니까 이 소녀가 집안사람들을 쭉 관찰하는 거예요. 전쟁 이후에 엄마는 죽고 아버지는 딴 데 가서 살고 할머니와 살아요. 서울대 법대생인 삼촌과 이모도 함께 살아요. 앞집에 양복점과 사진점, 양장점을 막 관찰해요. 억척스러운 아줌마도 등장해요.
이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정말 세상은 별 볼일 없구나. 나는 성장하고 싶지도 않아. 난 성장을 멈추겠어!’ 하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 시대 아저씨들/아줌마들의 문제점, 시대적인 문제점, 꿈과 교육의 집합체, 그리고 관점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한 거죠. ‘인생은 이런 거구나.’라고요.
그런데 이 소녀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해요. 능력도 없고, 사회적 약자인데, 세상이 부조리 투성이죠. ‘나를 지켜야겠다’라고 생각해서, 나라는 존재를 둘로 나눠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 아줌마들이 얘기하는 거예요. ‘쟤가 걔야? 쟤 엄마가 정신병으로 실성해서 죽었잖아.’ 그러면 “나는 나를 두 개로 나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 없는 모습은 ‘보여지는 나’ 때문인데, 그 ‘나’는 수모를 당하고 있어. 하지만 ‘바라보는 나’는 상처를 받지 않아.”하는 거예요.
‘세상의 무례함을 겪는 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간, 보여지는 나일뿐이야’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나뉘는 자기 방어적인 이야기를 독자들이 100쇄가 되도록 30년간 읽어준다는 건, ‘왜 이렇게 보여지는 나로 살아야 하나’ 싶은 마음이라는 거죠. 굉장히 ‘보여지는 나’를 위해 노력한다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모두 ‘바라보는 나’도 있어요. 맛있는 건 맛을 느끼면 되는데 ‘잠깐 사진 찍어야 해!’라면서 멈추죠. ‘이 책 참 재밌는데?’ 느끼기 전에, 책을 넘기는 손에 반지도 좀 끼고, 조명도 좀 챙기고, 바지도 좀 갈아입고, 커피잔도 좀 정갈하게 놓고, 그리고 나서야 다시 사진을 찍어요(웃음).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보여지는 나’와 달리 ‘바라보는 나’가 나를 보고 있어야 해요. 그것에 심취해서 보여지는 나로만 스스로를 평가하면 나는 점점 나로부터 고립돼요. 그리고 전부 평가에 의해서만 나를 자꾸 판단해요. 남이 ‘좋아요’를 많이 눌러주면 ‘잘했네? 그럼 이걸 어떻게 더 많이 받지?’하면서 점점 남들이 나를 만들어가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많은 작가들이 던진 질문을 읽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그냥 질문을 읽으면 안 되니까, 작가들이 이야기 구성을 재밌게 만들어놨어요. 소설은 기본적으로 재밌는 이야기인 동시에, 재밌고 섬세한 이야기예요. 보여지는 대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개별적이고 섬세한 방식으로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방식이죠. 소설이 결국 남의 인생을 보여주는 건데요. 그 인생을 통해서, 인권 감수성/환경 감수성을 배우게 된다는 거죠.
음.. 여러분 제가 사실 지금 너무 많은 준비를 해왔거든요? 제가 이렇게 강연을 할 때마다 준비를 많이 해요. 한 동료 작가가 자기는 준비를 안 한대요. 너무 이야기가 딱딱해진다는 거예요. 저는 준비를 안 하면 불안하니까(J에요) 역시 준비한 대로 안 돼요. 막 관심 갖는 얘기대로 흘러가거든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안 들으시는구나’, 그런 순간이 있어요(웃음). 얼굴 방향이 딱 똑같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집중하시는 건데요. 그런 걸 따라가다 보니까 시간을 지금 거의 다 채웠는데요. 사실 제가 글을 읽는 것도 준비했고(웃음), 여행 소설 이야기도 하려고 했고(웃음) 제가 작가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시간이 다 되어서 질의응답 형식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오늘 강연이 도라지 캐러 갔다가 산삼 캔 기분입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소설가는 왜 가라고 붙이고, 시인은 왜 인이라고 부르는지요? 한강 작가는 시인으로 데뷔해서 소설가가 됐고, 백석은 소설가로 데뷔해서 시인이 됐는데요. 이렇게 서로 교차하는 이유도 설명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소설가라는 단어는 (참 저도 부담스러운 말인데) 제가 알기로는 한자 ‘집 가’가 붙으면 완전히 전문성을 가지고 장인이 된 것 같은 사람에게 붙인다고 알고 있어요. 왜 소설가는 가라고 하면서 시인은 왜 인이라고 하지? 그런 생각은 못 해봤네요.
그리고 당연히 일단 시인과 소설가는 분량에서 차이가 나죠. 그런데 결정적으로 시는 압축적인 장르이기 때문에 소설적인 감각하고 시를 쓰는 감각은 좀 다르긴 한 것 같아요.
하지만 많은 작가들의 마음속에 시/소설에 대한 욕망이 다 있어요. 저도 대학에 다닐 때는 습작으로 시를 썼어요. 그래서 제 문장이 시적이죠?(웃음) 뭐 다들 이렇게 자랑 좀 하고 사세요(웃음).
제가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해서 시를 써도 이야기에 기승전결이 있는 얘기를 많이 썼어요. 작문 선생님이 ‘너는 산문을 써야 해.’라고 하셨거든요. 하지만 시를 쓰고 싶었어요. 시적인 문장을 쓰는 소설가로 만들어준 게 아닌가 싶고요.
한강 작가는 언제든 시를 다시 쓸 수 있겠죠. 어떤 단계를 밟은 게 아니라요. 김연수 소설가도 원래 시를 썼었고요. 음.. 그런데 소설을 쓰다가 시를 쓴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네요.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이야기가 많아지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한 시와 소설의 구분은 그 정도이고요.
어제 제가 박준 시인의 강연을 들었는데, 박준 시인이 ‘바다에 갔는데 눈이 내리는 걸 보고 “눈은 좋겠다 처음 보는 게 바다라서”라고 했다’고 해요.
만약에 제가 거기 있었으면 다른 이야기를 했겠죠. 저는 ‘순간적인 포착’보다 기승전결을 상상했겠죠. 눈이 바다에 와서 생겨나는 과정이 인생의 은유 같다고 생각할 수 있죠. 포착하는 방식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소설이 잘 안 쓰일 때 시를 좀 읽어요. 문장을 좀 더 날카롭게 해주는 것 같아요.
- 독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작가님의 작품을 읽었으면 좋겠나요? 독자들이 어떤 영향을 받았으면 좋겠나요?
= 저는 재밌는 소설가라는 말이 좋아요. 예전에 한 외국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어떤 작가로 불리고 싶냐고 해서 ‘급진적인 작가’라고 불리고 싶다고 했어요. 정해진 틀을 깨뜨리는 작가라는 의미였어요.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인간을 보면서 어떤 판단을 주로 내리는데, 그 판단은 우리 고정관념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래서 다 다를 수밖에 없죠.
먼저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 있겠고요. ‘나와는 다를 것’이라는 마음도 있을 수 있고요. 더 나아가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 등으로 이어지는 섬세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급진적이라는 건 가끔씩 오해를 받아요. 제가 1990년대에 단편 소설을 많이 썼는데요. 특히 여성 주인공이 가족관계나 사회에서 받는 부조리로 인해 상처를 입는 얘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쓰다 보면 여성이 집을 나가거나, 부모와 싸우거나 가족끼리 사이가 안 좋거나, 남편과 이혼하는 얘기가 나와요.
어떤 사람들은 ‘어 뭐야. 왜 이렇게 일탈이 많아.’라고 하시기도 합니다. 일탈은 틀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문학 작품은 틀이 전제돼 있지 않아요. ‘여자가 순종적이지 않고, 까칠하고, 불온한 얘기만 하네’라고 실제로 얘기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반대로 ‘불합리한 제도가 개인을 억압해 왔구나’라고 말씀하시기도 해요. 인간은 모두 억압받아요. 모두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해요. 어제 다 각자 해봤지만, 너무 다르잖아요. 보고 싶은 것도 다르고, 관계도 다르고, 체력도, 조건도 다 다른데요.
그런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단체 생활을 해야 하는 게 인류의 운명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조금 더 섬세하게 대해줄 필요가 있는 거죠. 제도로 묶어 놓으면 그 제도 밖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요. 소수자나 약자들이 양산되는 거죠. 우리가 그래서 조금 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어요.
그런 시각에서 보면 반항하고 일탈하고.. 그런 게 문학이에요. 문학은 성공담이 아니에요. 성공담은 자기 개발서죠.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라는 문장들이요. 반대로 문학은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불행해졌을까? 이 사람은 왜 좌절했지?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을까? 이 사람은 왜 배신당했나?’ 이런 얘기예요.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지? 어떤 편견과 제도가 이렇게 만든 거지?’ 물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가 단체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 존중받을 순 없어요. 완전한 존중을 바라는 건 엄청난 기득권자로써 폭력적인 방식인 거예요. 내가 불편하지 않다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 ‘불편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게 문학이거든요. 1990년대 신문 기사에 보면 ‘왜 이런 소설을 쓰냐’는 비판도 있었어요. 1980년대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소설이 많았죠. 하지만 1990년대 ‘글 잘 쓰는 뛰어난 여성작가’들이 많이 나왔죠.
지금은 사실 숫자적으로 여성작가들이 많은 활동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당시에 ‘그렇고 그런 연애 소설 이제 그만!’ 뭐 이런 엄중히 꾸짖는 기사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것이야 말로 문학이 하는 일이죠.
- 제 삶은 감정 과잉인 것 같아요.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화가 가라앉지 않을 때도 많아요. 사람을 울리는 휴머니스트로써 도대체 ‘감정’이 뭔지, 작가님의 말씀대로 객관적으로 감정을 메타인지하는 방법은 어떻게 터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우선 질문 주신 분은 공감능력이 뛰어나신 분 같아요. 너무 슬퍼지거나 너무 감정이 격해질 때가 많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쉬운 질문을 해주시다니요(웃음).
저는 책을 봅니다. 왜 우리 젊었을 때, 시련을 당하면 막 ‘나를 정비하겠다’고 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잖아요. 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막막할 때.. 차라리 저한테 집중했어요.
다른 일로 풀어보고 이런 것보다, 그냥 저 스스로에게 집중했어요. 대신 저의 강함에 집중해요. 강해지려면 글을 좀 많이 읽어야 해요. 제가 쓴 글 중에서 이런 말이 있어요. “사람을 위로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어떤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면 고향 사진을 보여줄 수도 있고, 애인을 소개해줘서 관심을 돌리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빠져서 마침내 파쇄하는 방법도 있다.”
벌레만 보면 피하는데, “벌레를 끝까지 볼 거야”라고 하면서 극기 훈련을 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러다 보면 “쟤 다리가 귀엽네?”하는 거예요. 징그럽고 무섭다고 생각했던 걸 보고 쟤를 그냥 내 원래 판단대로 하지 않는 거죠. ‘저런 삶은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는 거예요. 그거를 이겨내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쓴 책을 보시면 해답이 있으니까 제 책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