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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깃집만 남은 홍대 '굽고 싶은 거리', 우연이 아니다

우석훈의 <사회적경제는 좌우를 넘는다>

by 한량바라기

여전히 젠트리피케이션은 우리 사회의 큰 문제다. 비록 코로나19 때문에 요즘은 잠잠한 듯 하지만, 경기가 회복된다면 젠트리피케이션은 더 심각한 이슈가 될 것이다. 코로나19로 매출이 줄어들었던 자영업자들에게 달라지지 않은 임대료는 그 자체로 재앙이기 때문이다.


자영업자를 돕기 위해 정부가 하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착한 임대인’을 권유하는 현실. 과연 우리는 '조물주 위의 건물주'라는 이 시대의 '웃픈' 신화를 깰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우석훈 박사는 <사회적경제는 좌우를 넘는다>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바로 '평판'이다.


젠트리피케이션과 평판


저자는 젠트리피케이션과 관련하여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건물주는 아주 오랜 전부터 있어왔는데 왜 최근에 와서 임대료 인상이 문제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전에도 지금의 홍대나 망원동처럼 갑자기 뜨는 동네가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도 건물주가 있었을 것인데, 왜 지금과 달리 그때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이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세대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나라 경제는 한국전쟁 이후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급성장을 하게 되었는데, 경제성장과 함께 등장한 1세대 건물주들이 최근 몇 년 간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게 됨으로써 2세대 건물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 그들이 주축이 되어 임대료가 비싸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건물을 가지게 된 1세대 건물주의 상당수는 기존 세입자와 어느 정도는 균형을 맞추게 되고, 지역 상인들과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정보경제학 용어로 하면 '평판(reputation)'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동료 그룹이나 이웃들에게 너무 평판이 나빠져서는 장기적으로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 - 179p


저자는 무엇보다 평판에 주목한다. 평판이야말로 1세대 건물주들이 지역에서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낮은 임대료를 받아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역사회에서 건물주들이 그만한 정치적, 경제적 권위를 인정받고, 그 지역 전체가 함께 가치를 일정 수준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판의 힘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바로 이 평판이 사라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건물을 물려받은 2세대 건물주들은 그 전 세대와 달리 지역사회의 평판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역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역경제가 근간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경제가 대자본 위주로 편제됨에 따라 지역경제 자체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임대료를 터무니없이 올리고, 비싼 가격으로 대자본에게 건물을 팔려고 할 수밖에.


'조물주 위의 건물주'라는 최근의 표현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건물주는 옛날부터 있었고, 집값 올리고 임대료 올리는 것을 제도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 역시 요즘 발생한 현상은 아니다. 그래도 최근에 건물주에 대한 사회적 원망이 더 늘어나고 있다. 1세대 건물주가 최소한의 점잔을 떨었다면, 2세대 건물주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개념 자체가 탑재되지 않았다. 그냥 야만스러움, 태초의 자본의 탐욕스러움 그 자체인 경우가 많다 - 182p


이대 후문의 패션 상권이 무너지고, 홍대의 '걷고 싶은 거리'가 결국에는 고깃집만 남은 '굽고 싶은 거리'가 되어 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평판을 모르는 건물주들이 등장하면서 벌어진 일이며, 지역사회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극이다.


따라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와 괴리되지 않은 지역경제를 되살려야 한다. 대자본이나 재벌들이 들어와 서민들의 돈을 빼가는 경제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고 유통하여, 그 지역에서의 평판이 매우 중요한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그 지역 공동체의 힘이며, 저자가 이야기하는 일상적이고 소소하지만 같이 고민하는 삶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지역경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저자는 '사회적경제'에 주목한다.


지역과 사회적경제

267450923g.jpg ⓒ 문예출판사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경제는 아직까지도 낯선 개념이다. 비록 10년 전에는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5년 전에는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됐지만 여전히 관련된 용어들은 일반 시민들에게 생소하기만 하다. 정부와 지자체가 그와 관련된 조례를 만들고 홍보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사회적경제는 우리 사회 GNP의 1%도 채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개념이 낯설고 실적이 아직까지 미미하다고 하여 그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밝혔듯이 우리 사회에서 자활은 IMF 이후에 등장하여 복지의 개념으로 꾸준히 자신의 영역을 넓혀왔으며, 생협 역시 아이를 둔 부모들의 지지 속에서 계속 성장해 왔다. 비록 사람들이 잘 몰라도 이와 별개로 한 번 뿌려진 사회적경제의 씨앗은 엄혹한 시절을 견뎌가며 자기 기반을 잡아가는 중이다.


저자는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엄혹한 상황이 오히려 사회적경제가 발흥할 수 있는 조건임을 지적한다. 서구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경기가 나쁠 때 많은 이들이 사회적경제 울타리 안에서 최소한의 보호를 받았듯, 현재 우리 사회도 더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지역경제를 만들 수 있는 사회적경제를 활용해야 한다. 지역경제가 살면 지역사회가 살아날 것이고, 그러면 그 지역사회가 주민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이념 논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사회적경제라고 하면 아직까지 사회주의, '빨갱이'를 떠올리고, 이것이 특정 정당이나 특정 인물의 정책이라고 폄훼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바, 이를 극복해 내는 것이 사회적경제 확산의 첫걸음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사회적경제에는 좌우가 없음을 강조한다. 비록 우리 사회에서는 소위 진보인사들이 사회적경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 경제가 운용되는 지역의 현장에서는 좌우 구분이 무의미함을 강조한다.


분단이란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사회적경제가 좌파의 정책이니, 우파의 정책이니 규정하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판타지일 뿐이다. 실제 우리네 삶은 지난 대선 때 홍준표를 지지했던 이들과 문재인을 지지했던 이들이 한데 뒤섞여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공동육아로 아이를 키우고, 생협에 가서 먹거리를 사고,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데 좌우가 어디 있으며, 보수/진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제는 사회적경제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채 30%도 살아남지 못하는 자영업 시장에 부득이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사회적경제를 적극 알려야 한다. 더 가난해지지 않는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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