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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바라기 Aug 09. 2021

인천 내 일본과 조선의 경계, 홍예문

인천 자유공원 앞 홍예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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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자유공원 근처에는 오래된 문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 공병대가 1905년에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한 홍예문입니다.


이 문의 이름은 처음 혈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무지개 홍자에 무지개 예자를 써서 홍예문이 되었는데, 아마도 이는 조선민중들이 일본식 혈문이라는 이름 대신에 무지개문이라는 이름을 자주 써서였을 겁니다. 결국 이름은 부르는 사람의 의지가 반영되는 법이니까요.


홍예문은 현재 인천 송학동과 전동의 경계에 서 있는데요, 이곳은 1900년대 초 인천항 주변 각국의 조계와 조선인의 마을 간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인천항과 동인천역을 가장 가깝게 잇는 길입니다.


당시 일제는 자신들의 조계도 모자라 인천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응석봉 너머 만석동 일대로 눈을 돌렸는데, 일본조계에서 만석동까지 가려면 해안선 지역을 거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해변도로를 만드느니 응석봉 산허리를 잘라 홍예문을 만들기로 했죠.


일제는 높이 17m, 폭 10m로 화강석을 쌓았습니다. 설계, 감독은 일본인이 맡았고, 유명한 중국의 석수장이들이 공사에 참여했습니다. 흙을 나르는 등의 잡일은 기술 없고 돈 없었던 조선의 노동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일제는 이후 이 문을 통해 당시 포화 상태였던 일본인 거주지를 조선인 마을까지 확장하였고 물자 수송의 편리함을 도모했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이후에도 홍예문은 인천 사람들에게 특별한 공간이었습니다. 그 주변의 본격적인 개발은 195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인천 사람들은 그곳에 올라 멋들어진 풍광을 보며 더위도 식혔고, 데이트도 했다고 합니다. 주위에 고급주택이 들어서면서 영화촬영지로도 각광받았다고 하네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홍예문은 그곳에 그대로 있습니다. 역사의 흔적을 켜켜이 안고 우리의 근대를 이야기하고 있죠. 한때는 자유공원 옆이라 그 주위에 맥아더 장군을 모신 점집들도 많았는데, 요즘은 도시재생과 함께 꽤 예쁜 카페들도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답니다.


인천의 근대를 구경하시고 싶은 분들은 한 번 찾아가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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