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제목부터 낯선 책이다. 쓸모. 시장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환산 가능한 상품 혹은 인간의 가치를 뜻한다. 쓸모를 결정하는 주체는 언제나 타자이다. 타자로부터 인정받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면 보다 나은 처우를 보장받고, 일말의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10대에는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쓸모를 판가름하는 잣대였다. 부모님은 물론이거니와 또래 집단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면 언제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한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의 일탈과 낭비는 대부분 관대하게 받아들여졌고, 여물지 못한 발언에도 힘이 실렸다. 서울 유학에 필요한 큰돈을 대는 부모님께 덜 죄송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대학'의 쓸모 가치가 높다는 것을 부모님도 알고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20대에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으로 내 쓸모를 스스로 결정했다. 대기업 정규직에 취업한다는 것은 성실하고 똑똑하고 건실한 청년임을 입증하는 일이었고, 튼튼하고 풍요로운 울타리 안에서 안정적인 삶을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젊고, 꾸미기를 좋아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여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연애와 결혼 시장에서 특히 힘을 발휘했다. 30대 초반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적 없고 바랬던 적도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대한민국 중장년층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집안의 공동 가장 특히 '엄마'가 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은 생각보다 크고 넓다. 시장에서 이용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가 쥐었던 특권들이 정당하고 유용하다는 생각뿐 아니라 더 큰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는 보다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생각했다. 끝없는 욕심은 당연해 보였고 모든 노력들은 자발적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쓸모를 결정하는 '큰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쓸모 있는 존재'라는 안도감은 들었지만 때때로 무기력하고 만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은 허상이 아닌지, 진짜 내가 소망하는 것인지 자문하고 있다. 내가 그린 아름다운 미래가 과대망상 혹은 강요된 것이 아닐까 싶다. 누가 나의 쓸모를 결정하나? 이반 일리치는 질문한다.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인가? 직장에 고용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인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 것은 아닌지"(8p). 자본 중심의 사회에 살면서 소비와 그 방식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기계화된 세계에 화합하기 위해서는 순응하고 길들여져야 한다. 하지만 꼭 화합해야 하나? 왜 화합해야 하나? 정정한다. 자본주의와의 화합은 부정확한 의미이다. 자본주의에 사는 공동체와의 화합이 보다 명확한 뜻이겠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세운 규칙과 질서 그리고 사상에 화합해야 하는지 질문한 적 있나? 나는 없었다. 승자 독식 구조가 왜 당연한지.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만 왜 대다수는 패자가 되어야 하고 희생해야 하는지. 만인은 평등하다 했는데, 교육과 건강과 기술의 기회는 왜 불공평한지. 갈수록 그들과 나의 격차는 왜 더 벌어지는지. 내게 공동체와의 화합은 꼭대기에 집권하는 일부 기득권과 화합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개 그들이 방향과 질서와 규율을 정하고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 속박되어 살기 때문이다.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고 모순을 개선해 나갈 재간이나 수단은 내게 없다. 나는 비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것이 당연했고, 순응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보였다. 사회가 작동되는 주요 시스템 전반에 전문가가 포진해 있다. 전문가 집단은 권위를 가졌고 무한한 신뢰를 받는다. 이반 일리치가 #누가나를쓸모없게만드는가 에서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도 이 전문가 집단이다.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 시대.
"우리가 마주해야 할 사실은 필요를 만들고, 조정하고, 충족시키며 이 시대를 지배하는 전문가 집안이 새로운 종류의 카르텔이라는 점이다. ‘’’ 이 새로운 전문가들은 전문성으로 인간의 필요를 정의하고 충족시키면서 사람들에게 보살핌이라는 걸 제공하고 봉사하는 사람처럼 행세한다. "(57p)
"교육자, 의사, 사회복지사 같은 오늘날의 전문가는 마치 사제나 변호사처럼 합법적으로 권력을 확보하여 자신들만이 필요를 만들고 제공하도록 법을 제정한다." (58p)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효율성’을 담보하는 경제, 과학, 정치 등의 전문가는 미래를 이끄는 리더처럼 보인다. 대중에게 선진화된 삶을 제공하는 훌륭한 인물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대와 다른 경우가 많다. 그들이 가진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정당하게 분배되어야 할 것을 막고, 훨씬 많은 것을 취하고 빼앗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말이다. 기득권의 지대 추구는 재벌 독식 구조가 토착화된 대한민국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기업에게 몰빵해준 아찔하게 큰 조세 혜택들을 누가 만들었나.
기업에 고용된 형태의 노동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고 실제로 많은 일자리가 기업을 통해 창출되었다. 하지만 기업은 더 이상 일자리를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기업이 벌어들이는 돈은 천문학적으로 많은데, 그 어마한 부와 성장의 혜택을 독점하는 것은 자본가와 일부 전문가들이다. 기업의 법인세율, 비과세 혜택, 고소득 부유층 부담 세금은 그토록 관대한데, 왜 서민세는 갈수록 높아지는지 당췌 이해할 수가 없다. 조세 비전문가인 무식한 나는 입을 다무는 것이 미덕인 것일까. 정경유착에 의해 ‘전문가 그들만의 세상’에 사는 약자인 나는 갈수록 설자리를 잃어가는 것 같아 서글프고 불안하다. 거대 권력이 약자에게 나누어 준 알량한 기회를 수많은 대중들이 서로를 햘퀴며 경쟁하는 듯한 모양새가 그저 슬프다는 생각을 한다. 기회를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불공정해 보이지만 생존을 위해 계속 경쟁해야 한다.
멈추지 말아야 할 질문. 돌아가서. 나는 그들과 왜 화합해야 하나? 꼭 해야만 하나? 내 쓸모를 판가름하는 주체는 그들이어야 마땅하나?
"교육자, 의사, 사회사업가, 과학자 등 서비스 제공자들이 그동안 아무런 지탄도 받지 않고 해온 반사회적 기능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 이름은 지금까지 그들의 고객이 되어 자신을 갖가지 구속에 가두고 살아온 시민의 안일함을 고발한다."(46p)
질문하지 않고 스스로를 예속시켜 살았던 안일한 나를 고발하고 싶다. "전문성이 소멸할 때 인간의 필요와 도구, 만족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출현할 수 있다."(47p)는 이반 일리치의 급진적인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반 일리치가 던지는 질문만으로도 큰 생각의 전복이 된다. 이 책을 통해 #이반일리치 가 제시하는 대안 혹은 대책을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책의 말미에서 매우 것슬게 얘기하기도 하지만 던진 질문에 대한 해답은 독자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또 한 명의 전문가 이반 일리치에게 해답을 기대하거나 그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그들과 왜 화합해야 하나? 꼭 해야만 하나? 내 쓸모를 판가름하는 주체는 그들이어야 마땅하나? 침묵하지 않고 계속 질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