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여야만 의미가 있는 새로운 플랫폼
작년 하반기, 헤비 매거진 디렉터가 작품 판매 플랫폼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포스터를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커스텀해서 살 수 있으면 어떨까?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원하는 것을 골라서 완성할 수 있는 포스터.
매뉴얼 모드라는 이름은 꽤 진행된 이후에 지어진 이름인데, 사진기에서 수동(manual)으로 조리개의 크기와 셔터 속도의 값을 조절함으로써 노출값을 설정할 수 있는 환경인 매뉴얼 모드와 사용자가 직접 포스터를 구성한다는 의미가 잘 맞닿아 있는 제목이 되었다.
일반적인 포스터는 작가가 ‘완성해놓은 작품’을 구매해서 걸어놓는 방식인데, 구매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순서대로 고르고 레이어링을 직접 하면서 작품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창작자와 관람자의 수직적인 일방향 공급이 아닌, 관람자에 의해 서로 얽히고설켜 어떤 작품이 완성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기존 방식보다 평등하고 열려있는 플랫폼의 토대를 만들어준다.
인터넷의 무한한 자료에 직면해 선택(selection)은 주요한 작동 원리로 떠올랐다. 우리는 맨 처음부터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구성요소로부터 새로운 파일을 만들어낸다.
— 디지털 격차: 동시대미술과 뉴미디어, 클레어 비숍
동시대 예술작품은 '창조적 과정'의 최종 결과물(감상의 대상이 되는 완성된 생산품)이 아니라 항해의 장이며 포털인 동시에, 행위의 발생인이다. 예술 작품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종결점이 아니라 무한한 작업들의 연속물 속 한 순간에 불과하다.
— 포스트 프로덕션, 니꼴라 부리요
비숍은 할 포스터의 아카이브 충동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으고, 재구성하고, 병치하고, 디스플레이하는 욕망(drive)’을 이야기하는데, 이 욕망들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감각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핑하고, 선택하고, 재구성하고, 디스플레이하는 것은 이미 일상생활에서도 예술 작품으로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매뉴얼 모드는 이러한 동시대적 감각을 플랫폼으로서 구조화하고 작가와 관람/소비자에게 특정한 틀을 주어 실험하는 장이 되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으로는 ‘왜 관람/소비자가 선택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분법적이고 수직적인 사고를 지양한다고 말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이전과 같은 사고방식을 고수한다.
새로운 생산에 대한 필요성을 낳기 때문에, 소비는 생산의 원동력이자 모티브이다. 이것, 즉 선택하는 것과 제작하는 것, 소비하는 것과 생산하는 것 간의 동등성을 성립해 내는 것이 바로 레디메이드의 근본 가치인데, 이는 노력을 숭배하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땀 흘리며 일하기)나 노동자 영웅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 포스트 프로덕션, 니꼴라 부리요
‘선택하는 것과 제작하는 것, 소비하는 것과 생산하는 것 간의 동등성’을 창작자들이 이야기하는 만큼, 그들은 진정으로 관람/소비자가 동등하다고 생각해왔을까? 작가들의 내러티브가 관람/소비자에 의해 재맥락화되고 재배치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이상의 고귀한 의미가 있어야 할까? 비숍이 위의 책에서 말하듯,
이제 더 이상 원본성과 저자성에 대한 질문이 핵심이 아니다. 대신에 중요한 점은 기존 산물의 의미 있는 재맥락화이다.
기획과 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기존의 단일한 레이어에서 반투명한 사진 레이어와 안개처럼 언뜻언뜻 레이어 되는 다양한 방식이 더해졌다. 작가들은 포스터가 어떻게 완성될지 예상하거나 계획할 수 없는 상태에서 완결되지 않은, 중첩을 위한 작품을 기고했다. 이런 연장 선상에서, 매뉴얼 모드의 주제는 ‘성장 Growth’이 되었다.
의도적으로 일부분이 비워진 레이어는 미지의 사용자에 의해 쌓여가면서 저마다의 '성장'을 만들어갑니다. 성장이 그러하듯, 매뉴얼 모드의 포스터는 '완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뻗어나갑니다.
…
성장은 곧 실패일 수도, 과정일 수도, 고독 혹은 성공, 또 다른 자유일 수 있습니다. 성장이라는 단어에서 쉽게 연상되는 완성형에 대한 이미지보다는, 우리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성장에 대한 수많은 내러티브를 이루는 레이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레이어가 또 다른 사람에게 인식되고 사용될 때, 그 확장은 또 다른 성장을 도울 것입니다.
— 텀블벅 본문
초기 기획 단계에서는 웹사이트 뿐이었지만 작가를 섭외하고 텀블벅에 펀딩을 계획하면서 아트북 외 마스킹 테이프, 유리컵, 노트북 슬리브, 티셔츠 굿즈를 추가적으로 디자인했다. 또한 홍대 wrm (whatreallymatters) 전시장의 대관 지원에 선정되어 9월 초에 오프라인에서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작품들을 물리적으로 레이어링 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기획부터 개발, 디자인,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협업은 힘들었지만 얻는 게 너무 많았고, 확실히 클라이언트 잡과는 스트레스 요소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클라이언트 잡은 어찌 되었든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면 확실한 보상이 뒤따라 오지만, 이런 프로젝트는 하나부터 열까지 일종의 배팅이다. 클라이언트와는 협의 과정이 있지만 텀블벅은 오픈하기 전까지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를 얼마나 이해하고 좋아해 줄지 알 수 없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운영진과 협업하는 사람들에 의해 순간순간 판단/결정되어야 한다. 아직 아트북 제작과 전시 설치라는 큰 산이 두 개나 남아있지만 여기까지 버텨온 나와 헤비 매거진 대표 디렉터에게 박수 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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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umblbug.com/manualmode
헤비 매거진 @heavy_magazine
헤비 매거진은 동시대의 여성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출판 및 온라인 플랫폼. 여성이 만들고, 여성을 소개하는 헤비 매거진은 서브컬처, 언더그라운드 아트 신을 배경으로 새롭고 실력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여성 작가들을 조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