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집을 짓기 위해 설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집 지을 땅을 찾고 나면 자연스레 이어지는 수순은 건축가를 찾는 것이다. 설계도가 있어야 시공사에게 견적을 의뢰할 수 있다. 견적이 나오면 예산을 점검하고 본격적인 집 짓기가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집짓기 프로세스는 ‘땅찾기—>건축가선정—>설계진행—>비교견적의뢰—>시공사선정—>시공계약 및 공사시작’의 6 단계를 거친다. 건축가를 잘 만나는 것은 좋은 집 짓기의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괴테는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어진다 ‘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으며, 다른 하나는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건축주가 원하는 방향과 전혀 다르게 설계도가 완성된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건축가만 맹신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설마, 설계를 수행하는 전문기술자가 건축가인데 방향을 잘 못 잡을 수도 있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옛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준비 없이 방심하면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좋은 건축가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좋은 건축가는 해당 분야의 이론과 실무경험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계 후에도 건축주와의 좋은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설계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간을 들인 만큼 좋은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설계이다.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설계 프로젝트에 투여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다. ‘시간은 곧 돈’이기 때문이다. 투입된 시간만큼 설계비를 받을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지만은 않다. 건축주와 건축가는 설계비용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주장하곤 한다. 건축주는 ‘설계비를 이렇게 많이 주는데 왜 이것밖에 신경을 안 써주나?'라고 불평은 반면, 건축가는 '시간을 투입한 것에 비해 설계비가 턱 없이 부족한데 언제까지 신경을 써 줘야 하나?' 라며 답답해한다. 설계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그 둘의 의견 대립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건축가는 전문기술자라는 명분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건축주(비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건축주는 내키지는 않지만 건축가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거나 대립할 수밖에 없다. 타협은 생각지도 못한다. 위와는 반대로 건축주가 막무가내로 자신의 의견을 반영시켜 달라며 건축가에게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전자와 후자 중 어떤 상황이 옳고 그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지극히 주관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축가로서 이 부분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다른 용도의 건축물이 아닌 상시 주거용 집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건축주의 의견을 최대한 설계에 반영시켜줘야 한다. 건축주의 의견과 건축가의 의견을 백분율로 굳이 표현하자면 90:10 정도. 건축가는 건축주가 목적지까지 샛 길로 새지 않고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길라잡이와 같다. 집은 거주자의 삶을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과도 같다. 그릇의 주재료는 거주자의 삶의 이야기이다. 건축가는 그 재료를 가지고 거주자가 원하는 그릇을 빚어가는 도자기공이어야 한다. 그릇의 주재료인 흙이 없다면 그릇 자체를 빚어갈 수 없듯이 건축주의 스토리가 빠져 있는 집은 마치 ’ 속 빈 강정‘과 같다. 따라서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설계라는 행위보다 중요한 요소, 즉 주재료가 되는 '삶의 이야기'가 반드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명제는 그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릇을 어떻게 빚어 갈지에 대한 고민이다. 그릇이 용도에 맞게 잘 빚어지면 주인의 손에 오래도록 잘 사용된다. 건축주의 삶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녹아들어 간 집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런 집은 완성 이후에도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의 가치도 높아지고 오래 살아도 질리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건축주를 만나보았다. 그들만의 삶의 이야기를 듣었고, 그 이야기들을 집 안에 담아왔다. 건축가로서 가장 설계하기 어려웠던 집을 꼽으라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살고 싶은 집에 대해서 이야기가 없는, 삶 이야기가 빠진 건축주의 집.”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건축주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지 못하면 부담은 고스란히 건축가에게 전가된다. 이때부터 건축가는 대필작가(Ghostwriter)로서의 직업을 하나 더 갖게 된다. 건축주에게 어울릴만한 이야기를 상상하며 스토리를 쓰고 그것을 바탕으로 설계 안을 짜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몇 가지 설계안이 만들어지면 건축주와의 미팅을 통해 의견을 좁혀나간다. 그리고 부랴부랴 최종안을 확정한다. 대필작가(건축가)의 글(이야기)은 전문작가(건축주)의 글(이야기)을 대신할 수 없다. 건축주의 이야기가 빠진 채 건축가의 상상 만으로 만들어진 집은 '속 빈 강정'이 될 확률이 높다.
얼마 전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진행해 오던 주택 설계 프로젝트를 포기해야만 했다. 연면적이 1,000 m2(300평)이 넘는 대저택이었다. 이 집이 완성된다면 건축가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이 프로젝트 하나에만 온 신경과 시간을 집중해도 될 정도로 설계비도 넉넉했다. 집이 들어설 땅도 너무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건축주도 나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이렇듯 거의 모든 조건을 갖춘 프로젝트를 내가 먼저 계약 해지 요청을 한 이유는 바로 '스토리의 부재' 때문이었다. 건축주의 삶 이야기가 없다 보니 기준점, 즉 시작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해리포터를 쓴 J.K 롤링과 같은 상상력 풍부한 작가였다면 수십 수백 가지의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서 건축주에게 제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택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자신의 상상력은 최대한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야기가 아닌 그 집에 살게 될 건축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설계가 되어야 한다. 건축주의 이야기는 건물의 기초와 같다. 기초가 든든하게 서있지 않으면 그 위에 지어지는 건물은 약간의 외력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건축주의 이야기를 끌어내어 보려고 수십 번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도 이 프로젝트를 포기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건축주의 이야기가 빠져 있는 집이라!"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설계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풍성한 삶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건축주가 바라고 원하는 삶의 이야기 말이다. 이야기를 풍성하게 끌어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가족들이 함께 모이면 된다. 가족구성원 각자가 생각하고 살고 싶은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거다. 저녁에 식탁에 둘러앉아 있을 때도 좋고, 식사 후에 차를 마시면서도 좋다. 하루 이틀의 시간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생애 첫 번째 집을 지을 때 가족과의 대화를 쏙 빼먹었었다. 아니 하루 정도는 아내와 딸(그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의 의견을 수렴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 하루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었다. 내가 소위 건축전문가라는 이유를 앞세워 의견을 무시했었다. 그 후로는 이사 들어간 날까지 우리 가족은 그 집을 짓기 위해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아내와 딸에게 그 첫 번째 집은 어떤 집이었을까? 입주하고 1년쯤 지나서 아내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마치 어퍼컷을 한 대 맞은 거 마냥 머리가 띵 했던 기억이 있다.
"이 집은 당신 집이지, 내 집은 아니잖아요!"
"무슨 얘기예요, 이 집이 왜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신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애를 쓰며 지었는데..., "
"제 의견은 하나도 반영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게 내 집이에요?"
"...., "
1년 동안 내가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그때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당연히 이 집은 아내와 딸을 위해서 지었으니까 이곳에서 사는 것이 아내와 딸에게는 행복 그 자체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이야기가 빠져 있는 집은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공허한 공간일 수 있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건축가로서 내가 예비건축주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최우선 조건이 하나 생겼다. 가족 간의 대화를 통해서 삶의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그것을 건축가인 내게 최대한 공유해 달라는 것. 가족 간의 대화가 많았던 건축주들이 느끼는 집에 대한 만족도는 그렇지 못한 건축주들의 집에 비해 상당히 높았다.
이번 생애 두 번째 집을 기획하는 나는 첫 번째 집에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다짐했다. 설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가족들과 대화를 많이 하기로 말이다. 건축가로서 내가 원하는 것과 가족들이 바라는 것이 설사 다르다 해도 그 의견이 전문기술자(나)로부터 묵살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단순히 필요한 공간을 벽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시간은 조금 더 필요했다. 하지만 시간낭비가 아닌 의미가 있는 시간 소비였기 때문에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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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어떻게 살 것인가-3 (우리 가족의 삶의 이야기가 담긴 그릇 빚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