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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튼 Feb 23. 2018

마로니에 공원, 철학관

20170929


2014년 내 방은 길음에 있었고 내가 탄 버스는 혜화로 향했다. 성신여대를 지나는 버스 창 밖으로 철학관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여자랑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시내의 타로카페에서 만 오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잘 맞네 안 맞네 수다는 떨었지만 점을 보러 다닌 적은 없었다.


그 해 겨울 대학원을 자퇴했다. '일신상의 사유'라고 쓴 자퇴 서류를 제출하러 3층 행정실에 들렀다. 대학원을 입학하며 맡았던 학과 사무실 조교 직책 역시 관두게 되었기에 이와 관련하여 직원 분들과 몇 가지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학과장님과 면담을 했는지 묻는 직원 분에게 그렇다고 답하는 걸 끝으로 행정실 문을 나섰다.


자퇴를 했어도 원룸 계약기간이 남아 있어서 한 두 달 길음에 더 머물렀다. 딱히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낮에는 헬스장에 가던가 아니면 방에서 미드를 봤다. 브레이킹 배드를 참 재밌게 봤는데 주인공 월터 화이트처럼 방에서 혼자 삭발을 했다.


밤에는 술이 땡겼다. 나는 혜화로 가서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끝나면 마로니에 공원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점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길거리 부스의 점 보시는 분들에게 내 운명을 물었다. 보통은 혼자였지만 친구도 데려간 적 있다.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 자꾸 한자말을 섞어서 말씀하시는 게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술기운 때문에 못 알아듣겠는데 거기다 대고 뜬구름만 잡으시니까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에는 돈은 없는데 점을 보기는 봐야겠고, 그래서 점을 봐주신 선생님께 몹시 적은 돈의 복채를 드리고는 구렁이 담 넘듯 천막을 빠져나왔다. 나와서 생각하니까 너무 죄송해서 편의점 커피를 사 들고 돌아가 그분께 드렸다. 그리고 또 도망을 나왔다.


어떤 분은 내 운명에 관한 말씀을 마친 뒤 종이 위에 한자를 가득 휘갈겨 써 주시며 이 종이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종이를 어디다 두었는지 언제 어떻게 버렸는지 아님 그냥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다. 여느 때처럼 부스의 선생님은 내 이름과 사주를 바탕으로 나의 타고난 성격과 인생의 시기별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일러 주셨다. 나는 그분께 앞으로 뭐 해먹고 살아야 좋을지를 여쭤보았다. 그분은 내가 학자가 되어 공부로 밥 벌어먹을 팔자라고 하셨다. 그러면 선생님, 저는 이번 생에 어떤 사랑을 만나야 하죠? 결혼은 또 언제 하는 게 맞나요? 그분은 말씀을 계속 이어 가셨다. 나는 겉으로 경청하는 시늉을 했다. 얼마 전에 자퇴한 사람한테 공부를 하라시니까 웃음이 터지려고 하는데 그걸 참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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