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인생에 마지막 친구

by 안경숙


젊은 시절 부지런히 억척스럽게 일하던 엄마는 친구가 없었다. 아니 있었겠지만 내가 아는 친구들은 별로 없다. 초등학교 3학년에 6.25 전쟁이 나서 학교를 그만두고 전쟁 끝나고는 엄마가 돌아가셔서 다시 학교로 복귀하지 못했다. 그 후 동네 묘포장에서 일하는 소녀가장으로 동생을 돌보았으니 친구 사귈 여건이 안 되었을 테다.

열아홉에 시집와 2년 만에 남편 돌아가시니 스물한 살에 애 딸린 여인으로 홀로 남겨졌다.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고 만난 사람들은 영업상 고객이나 같은 계통 동료들이었테니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릴 때 내 기억으로는 엄마와 친하던 친척이나 동네 아주머니들이 몇몇 분 있었다. 그래도 속내를 털어놓을 단짝 친구는 아닐 터. 엄마의 우정과 교류를 생각하면 나는 가슴에 찬바람이 '휘~잉'하고 부는 느낌이다.


서울에 와서 가죽 공장을 다닐 때 친하게 지내던 아주머니들이 예닐곱 분 계셨다. 함께 놀러도 다니고 맛난 것도 드시러 다녔다. 30년이 넘은 얼마 전까지도 가끔씩 전화 통화를 하셨는데 엄마가 말씀을 못하게 되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아이들 키우고 연세 드신 후에는 노원구에 있는 초등학교 수영장을 오래 다니셨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 분들은 지금도 왕래를 하신다. 지금 사는 곳에 이사 와서도 수영장에서 사귄 친구분이 가장 친한 친구다. 집도 가까워서 가끔씩 들리시는데 대화를 못 나누시는 안타까움을 눈빛으로 주고받는다.


요즘은 데이케어를 다니시는데 거기서는 친구 분을 못 사귄듯하다. 많은 분들이 경증 치매시고 엄마는 인지는 좋으나 말을 못 하신다. 서로 간에 의미 있는 대화를 못 나누시니 우정을 나눌 기회가 없을 테다. 그래도 청력이 좋으시니 주위에 일어나는 일은 들어서 다 알고 계신다.


얼마 전에는 엄마가 돈 3만 원을 봉투에 넣어 이름을 써서 달라고 하셨다. 등원할 때 챙겨드렸더니 다음날 센터에서 돌려보내시며 무슨 돈이냐고 물어보신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파악하니 센터의 부장님 자녀분이 돌아가시는 애사를 당하셨다는 것을 직원들끼리 이야기했는데 눈치 빠른 엄마가 들으신 모양이다. 그래서 조의금으로 드렸다는 것이다. 센터에서는 그런 돈을 절대 받을 수 없다며 돌려보낸 것이다. 정을 나누기도 어려운 관계다.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은 서울 사는 시골 친척들의 친목회 날이다. 일 년 열두 번중 열한 번을 보리밥 뷔페에서 만나는데 엄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나가셨다. 시집온 후부터 시골에서 함께 한 분들이니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아는 사이다. 요즘 엄마가 참석하는 유일한 모임이다. 서로의 병이나 아픈 것도 다 아는 사이라 부담 없이 간다. 무슨 일보다 최우선으로 참석하려 하는데 아픈 후로 빠지는 달이 생기고 혼자 못 가시니 늘 모시고 가는 나의 스케줄에도 영향을 받는다. 나도 엄마의 친목회를 이제는 최우선 스케줄로 해놓았다. 평균 연령이 75세는 족히 넘으니 거기에서 나는 유일한 젊은이(?)다. 어제도 만사 젖히고 엄마를 모시고 갔다. 식사를 하고 집안 대소가 소식을 듣고 오니 몸은 피곤하지만 엄마 얼굴에 활기가 돈다.


노후에 돈과 건강만 갖추어진다고 행복한 건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맘 맞는 사람들과 만나는 기쁨도 큰 역할을 한다. 현역에서 물러나 은퇴를 하는 순간 일로 맺어진 관계는 대부분 끊어진다. 그러면 남는 것은 학창 시절 친구나 취미를 함께 즐기는 사람들일 텐데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노후의 행복에 큰 역할을 한다. 그나마도 몸이 아파 들어앉으면 모두 멀어지고 마지막엔 친척과 가족만 남는다. 인생의 즐거움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죽는 순간까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엄마를 보면서 그 말에 매우 공감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가? 나에게 그런 친구는 몇 명이나 되나? 생각이 깊어진다. 엄마에게 그런 사람이 없다면 엄마 인생의 마지막에 내가 그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다짐했다.


이전 20화비상사태는 꼭 금요일에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