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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마안 Apr 16. 2021

내공이 길러지면 욕심도 담력도 자라난다.

돈 빼고 다 모으는 컬렉터 - 그림 세 번째 이야기

코시국이라고 얘기할 만큼 이전처럼 해외로 나가는 일이 어려워진 요즘... 해외여행은 닿을 수 없는 추억처럼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언젠가부터 해외여행을 하며 좋은 그림을 몇 차례 만나다 보니,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여행지의 갤러리를 투어 하는 동선을 짜는 게 하나의 낙이었는데, 좋은 그림들을 만날 수 있는 루트가 차단되고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이 있다.

일본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섬 여행 중 찾아간 <Nei Museum of Art> 에서 - 텅장(?)이 되어도 컬렉팅은 늘 즐겁다. (2019)

하지만 돌아보면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손 닿을만한 가격의 작품들은 조금 더 컬렉션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킴은 물론, 늘 고민케 하던 가격에 대한 담력을 길러주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그동안 부담스럽게 느껴지던 국내 크고 작은 갤러리를 다니는 것도 이 때문에 더 이상 의기소침해하지 않게 됐고, 오히려 사람 손을 타는 그림들을 보는 게 좋아져 더욱 열정적으로 그림을 구매할 수 있는 갤러리나 아트페어, 경매회사 프리뷰 등을 다니게 되었다.



아트페어에서 우연히 만난 새로운 인연

매년 열리는 국내 최대의 아트페어 KIAF는 전국은 물론 해외 갤러리까지 다수 참여, 국내와 동아시아 컬렉터들도 많이 찾는 주요 연례행사 중 하나다. 국내의 거의 모든 갤러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행사인 만큼, 구매는 물론 시장의 경향까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갤러리라는 공간이 주는 특유의 부담감 없이 편히 둘러볼 수 있는 것도 아트페어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식지 않는 열정으로 수년 전부터 매해마다 행사장을 방문하지만, 한낮 월급쟁이인 나는 그저 윈도쇼핑만 실컷 즐기다 나갈 때가 많았다. 그래도 좋은 작품을 눈 앞에서 보이면 부스에 있는 갤러리스트에게 적극적으로 작품에 대한 문의를 하기도 하고,  당장에 작품을 구매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메일 등 간단한 개인정보를 남기기도 했다.


2019년 KIAF는 앞에서 쌓아온 담력을 앞세워 보다 적극적으로 좋은 작품을 찾아다녔다. 2018년까지 수년간 아트페어에 나오는 작품들이 비슷했던 것 같아 아쉬움이 있었는데, 2019년 KIAF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보는 즐거움은 물론, 무언가 인연이 닿는 좋은 작품이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넓디넓은 코엑스 전시장을 거의 끝까지 돌 무렵, 동행했던 사모님(아내의 애칭)이 갑자기 유심히 한 부스에서 오래 머무르는 모습을 보게 됐다. 전시장이 워낙에 넓다 보니 지친 기색이 역력했는데, 갑자기 없던 텐션이 생겨난 느낌이 들 정도로 부스 안에 있는 한 작가의 작품들에 몰입하고 있어 같이 보게 됐다. 

넓디넓은 코엑스 전시장을 거의 끝까지 돌 무렵, 동행했던 사모님(아내의 애칭)이 갑자기 유심히 한 부스에서 오래 머무르는 모습을 보게 됐다. 전시장이 워낙에 넓다 보니 지친 기색이 역력했는데, 갑자기 없던 텐션이 생겨난 느낌이 들 정도로 부스 안에 있는 한 작가의 작품들에 몰입하고 있어 같이 보게 됐다. 


임승현 作 <Piano Man - Can you play me a memory?, 한지에 혼합재료>


평소의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편안한 그림이었는데, 마치 그 편안함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배경을 이루는 색채와 터치감이 눈길을 끌었는데, 그림 속 양복쟁이 남성을 보다 보니 그 안에 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됐다. 


피아노를 치려는 남자의 표정 속에 씰룩이는 듯한 입술의 떨림, 건반을 터치하기 전에 내 기분이 잔뜩 모여있는 손가락... 이 기분은 건반을 조금 쳐본 사람이라면 분명 알 수 있다. 특히 정장을 입고 있는 그림 속 주인공은 마치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내가 아무도 없는 피아노 상점에 들어와 조용히 피아노에 앉아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는 모습을 상상케 했다. 사모님 역시 오랫동안 밴드에서 건반을 친 경험이 있다 보니 이 디테일에 몰입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작가님의 이력을 봤을 때 전혀 비싼 가격이 아니었음에도, 아직까지는 한 달 치 월급 이상의 그림을 사본 경험이 없다 보니 갑자기 생각지도 않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간의 담력 때문에 이런 고민도 하게 된 것 같지만, 이 정도 가격의 그림을 생각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결정을 하지 못한 채 긴 여운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림, 다시 보면 어떨까?

이 그림이 있다면 걸어뒀을 때 어떨까 하며 엽서로 상상하며 고민했다.


결국 그림을 사지 못하고 집에 들어왔지만, 부스에서 받아 온 그림의 엽서를 보며 집에서도 사모님과 이 그림 얘기를 계속했다. (오히려 이번엔 사모님의 고민이 깊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기분이 계속되는 걸 느낄 때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그림이 누군가에게 팔리지 않았다면 이게 인연이겠다 싶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다행히 경제권을 지닌 사모님이 이 그림을 많이 그리워해 의사결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보고 좋으면 질러 보는 걸로... 결국 나는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을 찾아 DM을 보냈고, 작가님과 연락이 닿았다. 작가님에게 그 그림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조심히 물어봤는데, 그림처럼 친절하신 작가님은 우리가 봤던 그림이 다시 전시된다며 얼마 후 열린 아트 서울이라는 작은 아트페어 행사에 나를 초대해 주셨다. 아마도 가망고객이기 때문에 흔쾌히 초대를 해주셨겠지만, 그 설렘이 다시 그 그림을 만났을 때도 다시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가님의 부스를 찾아가 직접 인사를 드리고 난 후 다시 그 그림 앞에 설 수 있었다. 그 날 우리가 느꼈던 그 감흥 그대로 부스에서도 가장 부드럽고 강한 포스를 발하고 있었다. 다행히 빨간 스티커는 붙지 않은 걸 보니 어쩌면 진짜 이 그림의 주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인연이라는 것은 쉽게 오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잊히지도 않는 것인가... 그 그림이 우리의 인연이라는 확신이 든 순간 나와 사모님은 결제를 조용히 하고 난 후 자랑스럽게 빨간 스티커를 붙였다. 옆에서 스티커가 붙는 것을 본 중년의 아주머니가 묻는다.


아주머니 : "이 작품 방금 사신 거예요?"

나 : "아... 네네. 지난번 키아프에서 보고 다시 와서 결정했어요."

아주머니 : "아... 이거 좋아 보여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주인이 따로 있네. 축하해요. 좋은 그림 잘 사셨어요!"



그림을 구매하며 배우는 뜻밖의 겸손함과 여유

그때 아주머니가 건네는 인사에 부럽다는 느낌보다 진심 어린 축하를 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그림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사심 없이 축하를 건넬 수 있는 여유(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지만)를 갖고 있구나 하며 언젠가 내 옆에 누가 좋은 그림을 사면 나도 저런 여유로운 모습으로 축하를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 전 돈은 어떻게 메우지 하며 걱정했던 것까지 잊혔다.


작품은 사이즈가 있다 보니 전시에서 빠지면 허전해질 수 있어 전시 이후에 받는 것으로 하고 집에 돌아왔다. 작가님은 배웅 인사로 '작품이 좀 더 가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주셨다. 오히려 이런 그림을 만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렇게 인사까지 해주시니 이 그림에 걸맞은 좋은 컬렉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작품 보증서 그리고 작가님이 같이 동봉해 주신 또 다른 프린트 작품

몇 주가 지나 집으로 그림이 도착했다. 아크릴 커버에 문제가 있어 예정보다 조금 배송이 지연됐는데, 그림과 보증서, 그리고 귀한 프린트까지 추가로 보내주셨다. 집에 작품이 들어오니 그림 하나로 확실히 집이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이 집에 걸리니 꿈에도 그리던 제법 큰 사이즈의 한국 작가 원화를 갖게 됐다는 성취감보다는 오히려  누추한 집에 귀한 손님을 맞이한 것처럼 낮은 마음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매일같이 즐기며 그림에게 마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우리 집에 와줘서 정말 고마워."



얼마 전에 케이옥션을 다녀왔다. 최근에는 비대면으로 경매 행사가 이루어지지만 프리뷰는 언제든 시간을 내여 방문하면 경매로 나오는 작품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얼마 전 김창열 화백의 작고 이후 그의 대표 연작인 물방울 시리즈가 대거 경매품으로 나오는 가 하면, 김환기, 박서보, 도상봉 등 유명 작가의 수작들이 대거 나와 웬만한 전시보다 훨씬 볼만했다.


이번 경매로 나온 쿠사마 야요이의 <튤립> 시리즈 에디션 판화

경매장이나 갤러리에서 누구나 알만한 작품들을 보고 나면, 요즘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예전엔 그냥 그랬는데 볼수록 다수가 인정한 명작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 그리고 저 작품들 중에서도 1호 정도는 어떻게 무리해서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면서 화제의 명작을 우리 집 한편에 걸어보는 것, 아마도 요즘의 담력을 생각하면 언젠가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이처럼 내게는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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