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멈춰도, 죄책감은 계속된다 – 저작권과 창작자 양심에 관하여
“이거, 예전에 누구 글이랑 되게 비슷하네요."
누군가 이런 말을 할까 봐 글을 올리기 전 사서 걱정을 하게 된다.
대학교 시절 과제를 제출하기 전에도 교수님의 ‘코드 카피 걸리면 0점 처리할 거예요’라는 말 한마디가 점수가 나오는 순간까지 나를 초조하게 했다.
그러나 다행히(?) 혼자서 과제를 했던 내가 카피에 걸리는 일은 대학 4년간 없었다.
혼자서 과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초조했던 이유는 혼자서 열심히 구글링 하고 코드를 참고하면서 과제를 풀었지만 혹시 나랑 비슷한 레퍼런스를 본 다른 누군가와 코드가 똑같으면 어떡하지? 재수 없게도 나랑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해 억울하게 카피에 걸린다면 어떻게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창작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프로그래밍 코드는 다른 사람의 코드를 내 것처럼 활용하는 게 개발자에게 능력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저작권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의 저작물을 내 마음대로 활용한다는 건 타인의 저작물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단순한 글을 적더라도, 글 안에서 내가 읽고 지나쳤던 글들을 무의식적으로 똑같이 따라 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글은 나의 글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발행 버튼을 앞둔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된다.
창작의 과정에서 무의식적인 인용과 영감, 경계 없는 차용은 언제부터 ‘표절’이 되는 걸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조용한 질문이 남는다.
“나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을까?”
저작권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기 전에, 최근 흥미롭게 읽은 이야기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가 저작권에 대한 고민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김동식의 단편집 <13일의 김남우> 속 단편 『나는 정말 끔찍한 새끼다』의 주인공 김남우는 어린 시절 장난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다. 사건의 가해지는 밝혀지지 않아 주인공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지만, 같은 반 친구 장진주는 그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고 이사를 가게 된다. 시간이 흘러 20년 뒤 어느 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김남우의 삶에 잊고 있던 장진주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
장진주가 돌아옴과 함께 주인공은 20년 전 지은 죄를 떠올리며 다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김남우가 잘못을 저지른 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죄책감을 갖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당사자에게 사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주님이 용서하셨다며 혹은 뻔뻔하게 합의금을 들이밀며 사과를 쉽게 입에 올리는 가해자들과 너무나도 대비되었다.
적어도 뉘우치고 있는 김남우가 그렇지 않은 가해자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죄책감이란 놈은 뉘우치는 사람에게 더 많이 찾아가고, 그들을 ‘조심스러운 침묵’으로 이끈다. 잘못을 의식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더 엄격하게 바라보고, 어디까지 용인되는지 계속해서 되묻는다. 그렇게 그들은 침묵 속에서 혼자 고민하고 갈등하며 고독한 싸움을 이어간다.
이런 감정은 창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작권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더 조심스러워진다.
단어 하나, 문장 구조 하나가 혹시 어디서 본 건 아닐까, 무의식 중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까 불안해하며, 완성된 글 앞에서 망설인다. 정말 독창적인 표현인지, 내가 무언가를 베끼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는 검열은 때로 스스로의 창작을 제한하기도 한다.
반대로 저작권이나 표절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당당하다.
온전히 새로운 게 어떻게 있을 수 있냐며,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라는 말 뒤에 숨어 쉽게쉽게 넘어가곤 한다.
죄를 자각하지 않으면, 죄책감도 없다.
잘못을 자각하는 사람일수록, 용서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묘하게도, 죄책감은 죄를 줄이기보다 오히려 ‘의식 있는 사람’을 더 무겁게 만든다.
그 무게는 법보다 더 오래, 더 깊게 남는다.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 침해는 종종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감을 받은 것인지, 무의식적인 복제인지, 경계는 애매하다.
그러나 때로는, 법적인 책임보다 마음속의 책임감이 훨씬 더 무거울 수 있다.
‘창작자 윤리’라는 말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고,
들키지 않았다고 해서 떳떳한 것도 아니다.
잘못을 자각하는 사람일수록, 용서를 구하기가 더 어렵다.
말하는 순간,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며
쉽게 용서를 구하기엔, 자신의 죄가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죄책감은 말할 수 없는 고요 속에 깃든다.
누군가는 들키지 않았고, 누군가는 잊었고, 누군가는 오늘도 미안하다.
죄는 감춰질 수 있지만,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저작권은 법이지만,
창작의 양심은 우리가 스스로 짓는 감옥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