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정말 나빴을까?

'쿨라크'와 넷플릭스『지옥』을 통해 바라본, 편견이 만들어낸 적의 얼굴

by 알레로그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며 주말에 뭐 했냐는 동료의 질문에 최근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별한 장비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이고, 돈이 많이 들지도 않고, 최근 뒤떨어진 체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자 다시 동료가 말한다.

“책임님도 그거예요? 빤스런? SNL 나왔던 런닝크루 같은 거?”

웃어넘겼지만, 묘하게 찔렸다.

SNL에서 밈이 되기 전 실제로 런닝크루에 들어가서 달리기를 해보기도 했고, 그러면서 같이 뛰는 게 동기부여도 되기도 해서 딱히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아직은 혼자 조용히 뛰고 싶어서 다시 시작한 내 취미가, 어느새 다른 사람에게는 밈이 만들어 낸 이미지 속에 던져져 있었다.

단순한 선택에도 우리는 집단적 프레임이 덧씌워진다.

그게 유행이든, 밈이든, 어떤 태도든 간에 말이다.

취미로 다시 시작한 달리기였는데, 세상의 눈에 나는 '빤스런'의 크루원이 되어 있었다.




집단이 만들어 낸 이미지는 꽤 강력하게 개인의 삶에 영향을 준다.

러시아 제국 말기, 농민 중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계층을 ‘쿨라크’라고 불렀다.

그들은 경험적인 데이터를 통해 정의되는 계층이었는데,

이를테면 한국에서 ‘10억 원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면 중산층이더라’하는 인식을 기반으로 그들을 실제 ‘중산층’이라는 계급으로 정의해 버리는 것이다.

단순히 분류를 위한 계급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어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스탈린이 1929년 이렇게 정해진 쿨라크 계급에 대한 청산을 선언했다.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한 공통의 적이 필요했고, 쿨라크는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들은 집에서 추방되어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고,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기도 하고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들은 악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처벌받을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지옥행 고지’를 받기 시작한다.

예고된 시간이 되면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 그 사람을 처절하게 죽인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죄’로 해석하며, 낙인찍기 시작한다.


“지옥에 가는 걸 보면 뭔가 잘못한 게 있었겠지.”


문제는, 아무도 그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그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낙인찍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공포 속에서 자발적으로 더 강한 도덕적 잣대를 만들어낸다.

두려움은 판단을 흐리고, 판단은 누군가를 향한다.

『지옥』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또 그 죄를 소비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쿨라크든, 지옥행 선고를 받은 사람이든

그들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처벌당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업, 어떤 유명인, 어떤 집단이 잘 나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성공을 ‘부정한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일부는 정말 문제를 일으키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그들이 문제일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바라본다.

우리는 오늘도 쿨라크를 만들고, 지옥행 낙인을 찍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뒤에는 그들이 정말 처벌이 필요해서가 아닌, 우리 자신이 안심하고 싶기 때문에 희생되어야 할 집단이 선택되고 있는 진실이 감춰지고 있는 것 같다.


편견은 때로 나를 보호해 주는 방패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방패는 너무 쉽게 누군가를 겨누는 칼로 바뀐다.

『지옥』과 쿨라크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건, 우리가 종종 누군가를 희생시켜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희생시키기 전 한 번쯤은 다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말 나빴을까?

아니면, 우리가 ‘나쁘다’고 믿어야 안심이 되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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