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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 병원으로 출근합니다

1. 25년 만에 다시 누른 119

by 그림책미인 앨리

진동벨이 울렸다.

책상 위에 엎어두었던 휴대폰이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가 강의 자료를 막 검토하던 내 집중력을 잠시 흩트렸다. 밀린 강의 준비를 생각하며 잠시 미루려던 순간, 휴대폰 진동이 더욱 요란하고 끈질기게 울렸다. 불안한 예감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화면을 확인하자 엄마였다. 망설이며 전화를 받았다.

“희야~ 희야~ 나 다쳤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가늘게 떨리는 음성에 순간 온몸의 피가 식는 듯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예? 엄마, 무슨 일이에요?” “나 미끄러졌어. 뜨거운 물에. 아파... 나 살려줘.” 엄마의 비명 같은 마지막 말이 귀에 박혔다.

갑자기 텔레비전 화면이 꺼진 상태처럼 머릿속이 텅 비고 멍해졌지만, 몸은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 내가 119 전화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25년 전, 아빠가 쓰러지셨을 때 이후 다시는 누르지 않을 줄 알았던 119 번호. 다시 떨리는 손으로 전화 버튼을 눌렀다. 극한의 공포이만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여보세요. 119죠. 지금 엄마가 화상으로 넘어지셨어요. 장소는 ㅇㅇㅇㅇㅇㅇ, 뜨거운 물을 들다가 미끄러져서 엉덩이, 발등이 화상 입은 상태이며 혼자 계십니다. 빨리 좀 가주세요.” 눈물이 흐를 새도 없었다. 무작정 슬리퍼 바람으로 지갑만 챙겨 엄마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던졌다.


엄마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119 구조대원이 응급 처치를 마치고 엄마를 들것에 싣고 있었다.

"아야... 흐흐흐, 아프다. 아프다.” 평소 웬만해서는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던 엄마의 고통스러운 비명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엄마의 들것 옆에 바짝 붙어 구급차에 같이 타는 것뿐이었다.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는 요란했지만, 차의 속도는 야속하게도 더디게만 느껴졌다. 마치 세상 모든 시계가 멈춘 채, 나 홀로 느린 시간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나는 차마 엄마의 상처 부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흐느끼는 엄마의 손을 잡고 “조금만 참으세요. 다 왔습니다.”라는 구급대원의 말을 반복해서 읊조릴 뿐이었다.

7년 전 발등 화상으로 입원했을 때, 퇴원하며 다시는 여기 오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더 큰일이 벌어지자, 피할 수 없었던 이 운명 앞에 괜히 엄마가 야속했다.



화상 전문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강렬한 불빛 아래 엄마는 곧바로 치료 침상으로 옮겨졌다.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엄마 상태를 확인했고, 나는 창백한 얼굴로 침상 모서리에 서서 숨 막히는 침묵과 불안한 예감 속에서 결과를 기다렸다. 길고 무거운 침묵 끝에, 보호자를 찾던 담당 의사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의사는 냉철하게 진단했다. “자, 보호자 분 여기 보세요.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요. 양쪽 엉덩이와 그 밑으로 생식기 부분에도 화상을 입었고, 무엇보다 발등이 앞뒤로 다 화상 입은 상태라 당장 입원하고 화상 입은 부분을 긁어내는 처치를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입원 가능하신가요?”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은 사치였다.

“입원 가능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원무과로 안내되었다. 병실은 12인실과 1인실 중 선택해야 했지만, 비용과 급박한 상황은 가장 빠르게 이용 가능한 12인실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밤늦게 도착한 3층 여자 병실. 어둠 속에서 엄마 침대 쪽만 불이 켜지고 옮겨졌다.

당장 고통을 덜기 위해 무통 주사와 진통제를 수액으로 맞았다. 나는 급하게 입고 온 치마와 잠바를 옷장에 넣고 엄마는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처럼 훌훌 벗어던질 수 있는 사치를 엄마는 부릴 수 없었다. 마치 거북이처럼, 혹은 슬로모션처럼 몸이 천천히, 고통스럽게 움직여 겨우 환복을 마쳤다. 눈물을 훔치며 누워있는 엄마를 뒤로 하고 병실을 나섰다. 간호사들에게 거듭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기고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사건 현장으로 돌아갔다.


집 안으로 들어선 현장은 잔혹했다. 습하고 매캐한 수건 삶은 냄새가 코를 찔렀고, 뜨거운 물이 바닥 여기저기 고여있었다. 수건을 담던 커다란 대야는 완전히 넘어져 있었고, 파란 슬리퍼 한 짝은 휙 날아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시뮬레이션처럼, 현장의 모든 증거들이 엄마가 뜨거운 물을 들고 이동하다가 미끄러지며 얼마나 처절하게 넘어졌을지 생생하게 그려주었다.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었다. 급한 대로 병원에서 필요한 준비물(속옷, 슬리퍼, 치약, 칫솔, 수건 등)만 허겁지겁 챙기고 집을 나섰다.

남편에게 엄마 상태를 설명하고 아이들을 부탁했다. 아이들은 학원에 간 상태였다. 나는 남편에게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당부하고 다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25년 동안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엄마는 울다 지쳤는지 잠깐 잠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병실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 집에 이야기하고 급하게 간이침대를 꺼내 누웠다. 작년부터 아프기 시작한 허리 통증에 딱딱한 침대에 눕는 건 고역이었지만, 어쩌면 이것은 자지 말고 엄마를 살펴보라는 계시 같았다. 간호사는 엄마가 평소 먹는 약을 물었고, 다음 날 가져오기로 약속하고 잠시 누웠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제 막 강의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기분 좋게 준비 중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엄마의 화상은 내게 청천벽력처럼 다가왔다. 앞으로의 일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하는 마음과 이 상황을 해결해 나갈 이성이 동시에 작동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여동생은 출장으로 발리에 간 상태고, 남동생은 서울에 있었다. 오로지 나 혼자 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더욱이 이날은 작년 출판사와 계약한 책이 드디어 출간되어, 모두에게 축하받을 준비로 한껏 흥분되어 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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