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럼, 여름에 어디 가는 걸 좋아하시는데요?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이 질문에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스의 황량한 섬
이라고 대답했다.
카르파...
나는 피렌체가 싫다. 밀라노도 싫다.
차라리 당당하게 키치한 서울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자기를 뽐내고 으시대지 못 해서 안달난 곳은 어디든 싫다.
더 싫은 것은
자신들은 그 도시의 미에 붓 털 끝 하나도 기여하지 않았으면서
마치 자기 자신이 그 도시인냥 동일시하며
턱을 올리고 다니는 같잖은 현대의 주민들.
파리도 그냥 그렇다. 런던은 더더욱.
이탈리아 북부에서 20년 넘게 나고 자란 친구가
처음으로 파리에 여행을 갔다고 해서
어땠냐고 물으니
그냥 그랬다고 했다.
그 말이 이해가 갔다.
기본적으로 죽도 밥도 아닌 도시가 싫다.
관광객과 이민자들이 뒤엉켜
차도에는 테슬라와 기아가 돌아다니고
중세 성곽 아래 중국인이 하는 싸구려 스시 뷔페집 빨간 간판이 보이는
그런 피렌체는 별로.
그럴 바에야 까놓고 온갖 잡스러운 것이
섞여 있는 서울이 좋다.
어느 곳에 여행을 간다면
산타마리아 성당 하나를 본다거나
천지창조 같은 대작 하나를 보려고
가지는 않을 것 같다.
차라리 나와는 다른 인간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얼 먹고 사는지
왜 거기에 사는지...
나는 그런 게 더 궁금하다.
적당한 소도시에 가서
유명하지 않은 광장 앞 적당히 지저분한 바에 앉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아니지만
누군가 설계한 작은 성당을 바라보며
그림자가 차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싶다.
발도르...
나는 황량한 곳이 좋다.
적당한 바람이 불고
건조한.
그 바람은 지중해의 바람이어도 상관없고
아펜니노에서 흘러나온 바람이어도 상관없다.
아무 초록도 심어지지 않은
맨흙. 그대로의 여백.
아마 그들은 욕심꾸러기가 아닐 것이다.
듬성듬성 보이는 사이프러스 나무들.
규칙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고심과 고심 끝에 계산되어
몇 십년 몇 백년을 심어지고 길러진,
언젠가는 흙으로 사라져버릴
순간순간이 변덕스럽고 주체할 수 없는
그런 자연이 좋다.
내가 황량함을 좋아하는 이유는
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회가 욕망이 넘치는 그곳에서
단호하게 선을 긋고
그만할 줄 아는 지혜와 절제가 느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