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극장 1.
그런 날이 있었다. 내가 꾼 꿈들이 우주로 흘러가는 걸 목격한 날. 그곳에서 부유하는 반짝이는 빛이 되는 걸 마주한 날. 그 애들은 말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너와 무관한 것이 될 거야.
그런 날이 있었다. 우울의 화산이 폭발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동굴이 생긴 날. 깊고 깊은 동굴에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은 잠을 청했다. 꿈을 꾸면 떠나보낸 이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어느 세계가 꿈이고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해서 더 좋은 곳을 현실이라 여기며 영영 깨고 싶지 않았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일기장에 본심을 여러 번 털어놓았지만 마음이야 어쨌든, 한 줄도 쓰지 못한 날들이 길어졌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면의 목소리보다 사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 더 익숙해졌다. 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이었더라 그런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지 오래였다.
자연스럽게 비현실적인 상상과 거리가 멀어졌다. 스트레스에 위압당하는 건 무척 쉬웠다. 스트레스는 내 약점을 잘 알고 있었고 나는 자주 굴복했다. 글을 쓰려고 백지 앞에 앉았지만, 막상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문서를 닫아버리기 일쑤였다. 내 안에서 시끄럽게 웅성대던 상상들이 막상 흰 백지를 마주하면 입을 닫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글을 쓰는 대신 떠올랐던 상상들을 모두 내 안의 이층 집 다락방에 밀어 넣고 그 애들에 대해 잊었다.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을 때, 갇혀 있던 그 애들은 성질이 나서 한 번에 우르르 창 밖으로 탈출했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상들이 탈출하던 날, 생생한 꿈을 꿨다. 탁 트인 공간에 앉아있었는데 통유리창 너머로 거대한 눈송이가 내렸다. 얼굴을 몇 개 합쳐놓은 듯 거대한 크기의 눈송이였다. 감탄하던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옆에는 아빠가 계셨다. 아빠가 나를 바라보며 웃으셨다. 이런 건 정말 처음이야. 대단한 눈이네.
아빠는 나와 함께 거대한 눈송이가 내리던 날의 목격자가 되었다.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었다. 나는 아빠와 함께 있었으니까. 잠에서 깬 뒤에도 조금 전 겪은 일처럼 생생해서 잠깐 아빠를 만나러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거대한 눈송이를 마주한 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상상을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글로 쓴 상상은 활자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구현했다. 멋진 일이었다. 거대한 눈송이를 목격하는 것만큼.
거대한 눈송이가 내리던 세상은 지금도 그곳에 존재한다. 상상이 존재하는 곳이며 동시에 내가 애도하는 곳이다. 어떤 평행우주 같은 곳으로 나는 그곳에서 녹색 소파에 앉아 아빠와 대화를 나눌 것이다. 아빤 어렸을 때 뭐가 되고 싶었어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삶이 어떻게 펼쳐지길 바랐어요? 내가 미처 물어보지 못한 질문을 던질 것이고, 아빠는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며 넌 왜 그런 게 궁금하니?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리곤 아빠는 빙긋이 웃으며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애써서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