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글씨를 만났을 때

환상 극장 2.

by 임이안

우울의 화산이 폭발했다. 숨어 있던 뜨거운 눈물이 용암처럼 흘러나와 여자가 기거하던 방의 바닥을 녹이고 아래로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동굴이 생겼다.


동굴은 생각보다 아늑했고 여자는 그곳에 녹색 안락의자를 가져다 놓고 시간을 보냈다. 동굴에서 EDM도 듣고 힙합도 듣고 스윙 재즈도 듣고 클래식도 들었다. 뮤직비디오도 보고 뮤직 페스티벌 영상도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용케 음악을 듣는 귀는 살아남았구나. 외로움으로 한 번 소멸된 여자는 조금 더 진보한 종으로 태어났는데 그건 사회인이었다.


사회인은 제대로 싸우는 능력이 필수였으므로 여자는 전화로 싸우는 법, 대면해 싸우는 법, 이메일로 싸우는 법을 배워나갔다. 싸우는 스킬이 늘어갈수록 진급했고 사람들은 여자의 능력을 알아줬다. 멋진 일이었다.


한편 사회인으로 싸우며 살아가는 건 정말 피곤했다. 소모적이고 이보다 더 지루하고 따분한 일도 없었다. 맨날 싸우기만 하던 여자는 고독했고 퇴근하면 더욱 극한의 고독이 밀려왔다.


동굴은 위안이 되었다. 동굴이 생긴 사유가 어떻든, 여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다. 여자는 안락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전생을 떠올렸다. 소멸된 생을 다시 불러왔다. 그건 빈 페이지였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동굴에서 오래된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전생에 주고받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전생의 단서가 숨어 있는 보물 같은 기억이었다.


그중 개나리색 편지지에는 작고 둥근 글씨가 빼곡히 차 있었다. 글씨는 말했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 이상하게 바라볼까 봐 시도하지 못한 일에 대해, 혹시라도 비웃음을 당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대해 얘기했다.


따뜻한 문장은 힘이 있었고, 여자를 다독였다. 이제 그만 싸우고 쉬라고 했다.


어떤 문장은 정말 마음에 들어 벽에 붙여놓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편지지의 몇몇 글씨들이 저마다 꽃을 들고 일어나 편지지 밖으로 나왔다. 이들은 동굴 벽에 꽃과 함께 보기 좋게 걸렸다. 여자는 벽에 걸린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쓸게. 학교 잘 다니고 건강해. 안녕.


문장은 평범했다. 매일 세수하고 이를 닦는 것처럼 일상적인 인사였지만 여자에게는 마치 삶의 어느 한 시절에만 허용되는 특별한 인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 누구도 여자에게 이런 인사를 건네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어쩌면 끝끝내 안부를 알 수 없을 글씨의 주인에게 역시 따뜻한 인사를 보내고 싶었다. 그날 여자는 우울의 화산으로 생긴 깊고 고독한 동굴에서 처음으로 빈 페이지에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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