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된 기억

환상 극장 3.

by 임이안

유진의 사촌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그날은 유진의 생일이었다. 유진이 아는 언니에게 대여했다는 카페는 빅토리아 양식이 반영된 고풍스럽고 우아한 앤틱 가구와 소품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나중에 온 누군가 천장에 사이키 조명을 설치했다. 저녁때부터 시작된 파티는 밤이 깊어가며 무르익어 갔고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면서 은은히 사방을 비췄다.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사이키 조명이 빅토리아풍의 초상화나 사슴 머리 모형이 걸린 벽 위를 흐를 때면 어딘지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파티에서 처음 사귄 친구가 유진의 사촌이었다. 쌍꺼풀 없는 큰 눈을 가진 그 애는 표정이 풍부했고 과장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처음에 이곳에 들어설 때만 해도 저녁 9시까지만 자리를 지키려고 했는데 유진의 사촌 덕분에 자정을 넘겼다.


둘 사이 공통점이라면 음악이었는데 둘 다 힙합부터 재즈까지 취향이 비슷했다. 우리는 시끌벅적한 카페에서 그나마 조용한 구석진 방을 찾아서 서로에게 음악을 들려줬다. 나는 혼자 듣던 리스트를 꺼내 그 애와 공유했고 그 애가 들려준 음악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한창 음악을 공유하다가 막차 시간을 넘겼고, 마침 집으로 가는 방향도 같았던 터라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초여름밤의 공기는 꽤 선선했고 우리에게 좀 더 걸어보라고 독려하는 것 같았다.


자주 다니던 길이었지만 늘 한낮의 풍경에 익숙해서였는지 한밤중의 풍경은 또 달랐다. 앞으로 거침없이 펼쳐진 늘씬한 도로는 이따금씩 자동차 몇 대만 오갈 뿐 조용했다. 그저 우수에 찬 가로등 불빛만 총총히 떠 있었다.


불 꺼진 카페와 샐러드 가게, 분식점, 로또 판매점, 글로벌 브랜드, 맥도널드 등이 있는 큰길을 걷다가 은행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면 주택가가 나타났다.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지는 조용한 길을 걷다 보면 홀로 불을 밝히고 한낮처럼 영업 중인 일식집이 나왔다. 한밤중인데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그곳을 지나며 우리는 다음에 이 음식점에 와보기로 약속했다. 다음에 다시 만날 것처럼.


밤공기는 평소에 하지 않던 이야기를 하게끔 만드는 내밀한 힘이 있었고 우리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 비밀스러운 건 아니지만 굳이 꺼내어 얘기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를테면 헤비메탈 드러머인 남자 친구에게 해골 귀걸이를 선물하려고 이대 골목의 피어싱 집에 갔던 일 같은 것 말이다. 당시 열다섯 살에겐 신세계 같던 지하실 풍경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다음에 다시 만날 약속을 기약했다. 형광색 미니 원피스를 입은 모델들이 줄줄이 나왔던 패션쇼에서는 덕수궁에 갈 약속을 했고, 은행잎들이 은하수처럼 펼쳐진 돌담길에서 학교 옥상에 올라가자고 약속을 했고 온 동네를 굽어보는 학교 옥상에선 좋아하는 밴드의 내한공연을 같이 가자고 약속했다.


유진의 사촌은 내게 멸종된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실없이 깔깔대며 누린 시간의 풍요로움을 일깨운다. 그곳에는 태어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새끼 강아지가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는 것처럼 사방에서 들려오는 냄새와 소리와 풍경에 현혹되던 내가 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은 각색되고 미화되어 아름다움만 남은 것 같다. 그 아름다움을 들춰보며 동굴에서 음악을 들었다.


유진의 사촌과 연락이 끊긴 지 이미 십오 년이란 시간도 넘었다. 그 사이 세상에는 거대한 균열이 생겼고 달력의 날짜가 의미를 잃고 밤이 가장 힘든 시간이었던 적이 있었다. 멸종을 겪던 그 해 겨울은 정말 힘겨웠다.

다 큰 성인이 화장이 번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울면서 출퇴근을 했던 날이 있었다. 누가 쳐다보고 이상하게 여겨도 무슨 상관이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었는데 그런 시선은 거기에 비하면 너무 하찮았다.


멸종 이후 나는 진화했고 다행히 음악을 듣는 귀는 살아남았다. 분주하게 사회인으로 살다가 동굴로 돌아오면 음악이 맞이해줬다. 음악과 같이 식사를 하고 좋아하는 리듬을 떼어 디저트로 먹고 좋아하는 리듬을 떼어 벽을 장식했다. 음악과 같이 한밤중의 별처럼 총총이 떠오른 도심의 밤 풍경을 바라보다 음악이 알려준 새로운 언어를 몇 글자 배우곤 하루를 마무리했다. 음악이 덮어준 이불에 얼굴을 묻고 꿈으로 도피했다.


꿈의 검문소에서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한다.


"이봐, 이렇게 허망한데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 거야?"


허망해지기 전에, 내가 지금껏 해온 모든 것이 허망이라는 가면을 쓰기 전에 서둘러 음악을 켜야 한다. 음악은 내가 지금 여기에 머물도록 일깨운다. 적어도 내가 그것에 귀 기울이도록 주의를 돌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이렇게 미끄러져 멸종 전에 존재한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던 빅토리아풍의 카페를 불러오고 유진의 사촌을 찾기도 하고 그 당시 존재했던 해골이 프린트된 스커트를 입고 한껏 웃음을 터뜨리던 이미 사라진 그 애와 조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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