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극장 4.
패스트패션과 글로벌 브랜드가 즐비한 거리에 우주 시네마란 간판을 단 건물이 있었다. 호텔은 우주 시네마와 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극장은 1층이었고 호텔은 2층부터였다.
예스러운 덧문을 열어야 엘리베이터 문이 나왔다. 2층 로비는 대형 트리와 온갖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했다. 리셉션 데스크에 서 있던 사람은 체구가 작은 소년이었다. 소년의 목소리는 밝고 유쾌하고 경쾌했다. 듣고 있으면 주변이 환해지는 목소리라서 나도 모르게 그 애 쪽으로 몸을 기울여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다.
소년의 머리칼은 노랑빛을 띤 오렌지색이었는데 어딘지 낯이 익고 친근했다. 그리고 만져보고 싶을 만큼 부드러워 보였다. 나뭇잎 같은 녹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은 호텔에 온 걸 환영한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은 보리스라고 소개하더니 작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흰색 정사각형 봉투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열어보니 그 애 눈동자만큼 짙은 녹색의 나뭇잎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가장 보고 싶은 기억을 만날 수 있어요."
보리스는 1층에 있는 우주 시네마에서 가장 보고 싶은 기억을 상영한다고 알려줬다.
짐을 풀고 우주 시네마에 갔을 때 지금 상영 중인 '안녕, 나나'란 제목의 포스터와 마주했다.
볕이 좋은 놀이터에서 사랑스러운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은 얼굴인지. 나는 잠시 그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나나가 떠난 뒤 꿈에서라도 만나기를 희망하며 잠에 빠져 살았다.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을 자는 시간이 더 길었다. 잠을 자는 사유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사람들이 주말을 어떻게 보냈냐고 물으면 사회적인 답변을 했다. 비교적 농담을 하며 지내는 친한 사람에게는 종일 잤다고 솔직히 말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심으로 내가 주말에 뭘 하고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터였다.
사회적인 답변으로 둔갑한 주말에 동굴에서 긴 잠을 잤다.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서 길고 큰 소득 없는 수면을 취했다. 나나는 그곳에서 바쁜 것 같았다. 새로운 곳에 잘 도착했다고 말해주면 좋겠는데 꿈에서 잠깐이라도 나타나면 좋겠는데.
막상 나나가 꿈에 나타나면 나는 그 애를 꼭 끌어안고 영영 놓지 않을 거고, 나나는 곤란할지도 몰랐다.
지금 그렇게 보고 싶던 나나가 눈앞에 있었다. 매표소에서 나뭇잎 한 장을 내밀었다. 짙은 녹색의 도톰한 나뭇잎이었다. 작고 아담한 상영관에 관객은 나 혼자였다. 정면에 걸린 네모 반듯한 스크린에서 반짝하고 떠오른 건 어느 한낮의 풍경이었다.
볕이 부드럽고 따스한 초여름이었다. 카메라 위치는 다소 낮은 편이라 지나가는 행인의 종아리 언저리까지만 보였다. 카메라를 위로 올렸을 때 곁에 서 있던 사람은 티셔츠를 입고 안경을 쓴 나 자신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보면서 활짝 웃었는데 그 모습이 생경했다. 웃고 있는 저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동일한 원자로 구성된 나의 분신이거나 평행우주에 사는 또 다른 내 모습을 엿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오래전 멸종된 개체였다.
나는 카메라를 향해 무슨 말을 하더니 카메라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나나의 시선이었다. 내가 나나를 안자 화면에는 사방이 온통 장미로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한참 동안 장미로 가득한 들판을 걸었다. 나나와 함께 걸으면서 수많은 장소를 마주쳤다.
친절함이 넘치는 마을과 불평불만이 많은 이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횡단했다. 금전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와 불화가 끊이지 않는 대도시도 있었다. 조화로운 소통과 유쾌한 웃음이 넘치는 동화 같은 마을을 지나 화려한 궁전으로 넘어왔는데 그곳에 사는 이들은 앞에선 체면을 차리고 뒤에선 서로 뒷담을 하면서 분주하게 살았다. 긍정적인 에너지와 사랑이 넘치는 외곽 도심으로 건너와 이후 서로 간 소통이 단절돼 구성원 모두가 극심한 고독에 빠진 외로운 마을을 지나왔다.
어디든 횡단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장소마다 지배적이고 위세 등등한 기운이 있었고 그 에너지가 부정적일수록 정신적으로 힘겨웠다. 그때마다 나는 나나에게 의지했다. 그 작고 보드라운 아이에게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육신을 의지했다.
다시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이 대지를 감싸고 어디선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귀띔이라도 한 것처럼 나나가 내 품에서 내려오겠다고 했다.
그동안 긴 잠을 자면서 다짐했듯 그 애를 절대로 내려놓을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다. 나나는 다시 한번 내게 이제 좀 놓아달라고 말했다.
바람이 한 번 더 불어왔다. 바람은 전보다 더 부드럽고 눈물이 날 만큼 포근했다. 그 애는 나나의 노랑빛이 나는 오렌지색 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나는 킁킁 바람 냄새를 맡더니 어리광을 피우듯 내 품에서 뒹굴었다. 그리곤 이제 좀 놓아달라고 했다.
나나를 보내고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굵은 눈물이 풀잎에 떨어져 구르고 흙에 스며들어 개미들이 사는 집을 방문했다. 굵은 눈물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호수를 만들 때 나나는 말없이 저만치 멀어져 갔다.
노랑빛이 섞인 오렌지색 털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났다. 포근한 바람이 다시 한번 불어왔고 그 애는 나를 향해서 소리 높여 뭔가를 외쳤다. 밝고 높고 유쾌한 소년의 목소리로.
나나의 언어는 따뜻한 햇살에 녹아들었다. 나는 다만 아까 보리스에게 그랬듯 그 애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더 잘 듣기 위해서, 이미 사라진 목소리의 여운을 붙들고 싶어서, 눈부신 햇살 아래 눈을 감고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리곤 다시 울기 시작했고 뜨거운 눈물은 깊은 강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흙 아래서 살던 곤충들이 불어난 물로 불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오래오래 울었다. 그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