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을 기억하다.

나의 확신이 칼이 되는 순간

by 꽃피랑

제주여행 가던 날은 공교롭게도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었다.

그날 교회에서는 사제가 신자들의 이마에 재를 바르며 말한다.

"사람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었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배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즐겁게 여행을 즐기기도 어쩐지 불편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제주여행 첫 코스를 제주 4.3 기념관으로 정했다.

전부터 생각하던 곳이지만 아이가 관람하기에는 너무 잔혹할 것 같아서 가지 못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근현대사도 배웠으니 이제는 같이 가봐도 될 것 같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이라는 목표 아래 이념과 종교를 넘어 협력하기도 했다.

여운형과 김규식 같은 인물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좌우합작에도 적극적이었다.

개신교, 천도교, 사회주의 등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럽게 해방되면서 이들 간의 연대에 균열이 생겼다.

같은 목표가 사라지면서 자신들이 꿈꾸던 이상을 현실화하고자 서로를 악마화하며 총을 겨누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제주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 비극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제주 4.3이었다.

부끄럽지만 사실 나는 제주 4.3을 '1948년 4월 3일,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 정도로 알고 있었다.

제주 4.3 기념관에 가서야 1947년 삼일절부터 1954년까지 이어졌던 국가 폭력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역을 통행하는 사람은 모두 폭도로 간주해 총살한다.'

포고령은 한 줄 문장에 불과했지만 당시 중산간에는 100개가 넘는 마을이 있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읽어보면 그게 얼마나 끔찍한 현실이었는지 체감할 수 있다.


서북청년단과 경찰은 누가 남로당인지, 마을사람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기에 의심 가는 제주도민들을 모두 없애버리기로 했다.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에서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마을사람들을 한 곳에 모은 다음, 총을 쏘고 불을 질렀다. 그날 살아남은 사람도 평생 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순이삼촌'의 문장은 유려했지만 끔찍한 장면들이 떠올라서 읽는 속도가 자꾸만 느려졌다.

그 총을 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공산당에 쫓겨 남한으로 도망온 사람들이 모여 서북청년단이 되었다.

그들은 한때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이제는 가해자가 되었다.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그들은 자신이 '빨갱이'라는 악을 척결하고 있다고,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었다.


토벌대와 남로당 양쪽에서 쫓기던 제주도민들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로 자원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들이 압록강까지 진격해서 올라갈 때,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을까? 그런 의문들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비극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나만 옳다'라고 믿는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도 사람보다 앞설 수는 없다.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는 순간, 그 믿음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정당성으로 둔갑한다.

상대를 대화해야 할 이웃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악으로 바라보는 시선,

거기에 국가권력이 더해질 때 대량학살이 일어나곤 했다.


나의 신앙이 옳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틀릴 수도 있다.

내가 모르는 이유, 혹은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는 대신, 대화를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제주 4.3 기념관을 나서며 생각했다.

언젠가 먼지로 돌아가야 할 우리가 서로를 심판할 수는 없다고.

더 이상 이념이나 종교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전 10화신은 혐오를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