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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책장 Nov 26. 2023

자연스러운게 가장 좋은거

귤까주지 마세요

지금은 못 먹는 음식 없이 가리지 않고 다 먹지만 어릴 때에는 싫어하는 음식이 많았다. 특히 고기와 버섯을 못 먹었는데, 덕분에 햄의 그 특유의 비린맛을 싫어해서 지금도 햄이나 육포는 굳이 찾아 먹지 않는다.

그래도 취향은 변하고, 입맛도 변하는 법이니, 대학생 시절 어느 날 밖에서 삼겹살을 먹고 돌아다니는 걸 알게 된 부모님이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 그날은 삼겹살에 소주를 먹고 들어와서 불타는 고구마 같은 꼴로 헤벌쭉거리니 더 가관이었겠지만 말이다.


나는 고기도 안 좋아했고, 우유도 잘 먹지 않았는데, 키 큰다고 알려진 음식 중에 콩나물과 두부, 청국장과 귤을 참 잘 먹었다. 특히 나는 콩밥도 좋아해서 지금도 흰밥을 싫어한다. 청국장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쿰쿰한 냄새가 옷에 배는 줄도 모르고 먹다가 중학생 시절에서야 내 몸에서 나는 청국장 냄새 때문에 그걸 멀리하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유전자 덕분인지 나는 편식하는 아이치고는 (밥을 양푼째 먹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유치원시절부터 늘 또래보다 키가 컸다. 그게 청소년기에는 참 싫었던 게, 여자라면 자고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앙증맞아야 하는데, 나는 떡대가 있으니 늘 어깨를 당당히 펴고 다니지 못했고 그래서 어깨가 굽어버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 큰 것 같지만 또 요즘으로 보면 그렇게 엄청 큰 정도는 아니니, 뭐든 상대적인 것이구나 싶기도 하다.


키에 있어서는 커서 스트레스였지, 작아서 스트레스였던 적은 없었기에 키 작은 사람들의 비애를 알지 못했고, 안타깝게도 나는 키가 작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는 키가 작은 편인데도 키 때문에 주눅 든다거나 그걸로 발끈한다거나 하는 것 없이 참 당당한 남자다.

당당한 남편을 얻은 대신 남편의 유전자를 고려하지 못한 탓에 나는 아이들의 키를 걱정하는 엄마가 되고야 말았다. 그렇게 키가 작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고기를 꼭 먹여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그래서 장을 보는 날에는 소고기 한 팩을 구입하곤 하는데, 비싼 가격 덕분에 꼭 한 팩만 산다.

다행인지 비싼 소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은 청국장을 좋아한다. 엄마가 시골에서 만들어 보내주시는 귀한 청국장이라 값으로 따지면 소고기보다 더 비싼 물건이지만 말이다.

그 냄새가 싫어 청국장을 잘 끓여주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니 이제는 자주 끓인다. 덕분에 집안 환기도 자주 시키고 얼마나 좋은가.(정말 그런가라기에는 너무 춥다.)




어릴 때 안 먹던 음식도 어른이 되면 먹기도 하니까 취향이라는 게 변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키야 무럭무럭 까지는 아니라도 슬금슬금이라도 자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바라보지 못하는 내 시선이 가끔은 가장 큰 문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귤도 그렇다. 손톱사이에 노란 껍질이 끼는 게 싫어서 귤을 잘 까먹지 않게 된 게 이십 대 어느 날부터였던 것 같다. 어릴 때는 한자리에서 몇십 개씩 까먹던 귤귀신이 이제는 손톱이 더 중요하게 되어버린 건지.

아이들도 귀찮을까 봐 귤껍질을 까서 그 앞에 대령까지 해줘야 겨우 마지못해 한두 알 받아먹는다. 그럴 때는 속으로 아이고 상전 나셨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스스로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나는 왜 뭐라도 더 입에 넣어주려고 그렇게도 부자연스럽게 행동했을까.

올해는 귤을 까주지 않기로 다짐했다. 작년에 자주 까주던 귤이지만 아이들도 스스로 하는 것이 익숙한지 이제는 스스로 까먹는다. 접시에 귤을 산더미처럼 담아 올려놓으면 어느새 오다가다 하나씩 까먹는 손길들 덕분에 식탁은 다시 폭탄 맞은 듯해지지만 귤냄새가 향긋하게 베어나는 거실은 덤으로 따라온다.


키만 크면 뭐 하나, 제 손으로 귤하나 까먹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건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얼마 전 어느 인플루언서의 피드를 봤다. 열심히 공부하는 어린이의 책상 위에 예쁜 접시가 놓여있다. 엄마가 까놓은 매꼬롬한 귤 다섯 알을 보며, 공부하는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저 예쁘고 비싼 접시를 자랑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아이를 위해 귤도 까주는 엄마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조금 헷갈리면서도 배알이 꼴리지만 부러운 나를 발견한다.

왜냐면 우리 집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인 것도 같고 사진으로 찍기에 적합한 접시도 없을뿐더러 나는 인플루언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큰 키를 가졌으면서도 늘 귀엽고 자그마한 여자아이들이 부러웠고(사실 그 애들이 인기가 많은 건 키 때문이 아니고 예쁜 얼굴 때문이었거늘...) 편식을 해도 키가 쑥쑥 클 수 있게 해 준 엄마의 요리 솜씨와 유전자에 대해 감사는 못할 망정, 아침부터 청국장을 끓여서 냄새나게 생겼다고 짜증만 부리던 여중생의 내 모습도 소환된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장점을 보지 못하고 매일 숙제하라고 잔소리하는 엄마의 모습과, 키 작으면 어떠랴 마음만큼은 키다리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을 해주지 못하는 내 입을 반성해야 하는 건데 말이다.

청국장과 콩나물만 있으면 한 그릇 뚝딱하는 어린이라면 사실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하지 않은가, 귤도 제 손으로 야무지게 까먹으면 됐지, 뭘 바라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수록 그렇게 아이는 커가는 것일 테니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귤도 혼자 잘 까먹는답니다, 나도 자랑 한번 해보자. (근데 이게 자랑거린가?)



<에필로그>

아들 : 엄마 내가 반지 줄게. 손가락 내밀어봐.

나 : 반지? 근데 왜 귤을...

아들 : 귤반지~~~~

나 :(으아악!!!!) 으으.. 응.. 예.. 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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