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어른이나
아이들이 어릴 때 누군가에게 맡기고 출근하는 선생님들을 가끔 보는데 쉬는 시간에 보건실이나 학년 연구실 구석에서 유축을 하는 그녀들을 볼 때면 대단하기도 하고 당시에는 그게 당연해보이기도 했다.
한 번은 옛 부장님의 라떼는 이야기를 듣다가 경악한 적도 있었는데, 출산 후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을 하셨고, 쉬는 시간마다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데리고 오셔서 수유를 했다고. (90년대 이야기다.)
아이를 낳기 전에 보고 들은 그런 일들은 그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옛날이야기"나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전래동화를 한 편 듣는 느낌이었다. 직장이지만 어쨌든 사람이 사는 곳이고, 특히 어린이들을 키우는 곳, 학교라는 공간에서 아기를 낳아 키우는 일은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가 아이를 낳은 후에는 슬픈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그녀들이 불쌍해서가 아니고 나는 아무리 급해도 아이를 봐줄 누군가가 옆에 없다는, '내가 제일 불쌍해'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보니 나의 직장이자 애정을 키우던 공간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속박당하는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담임선생님이 쉬는 시간에 보건실에 가서 유축을 하고 온다는 걸 알았을 때 누군가는 민원을 넣겠지. 사실 이걸 알려면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데, 아이들에게 "선생님 유축하고 올게"라고 말하고 가지는 않을 테니까 어떻게 알았는지는 참 의문이지만 말이다.
요즘에는 민원이야 뭐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학교라고 딱히 민원이 없을 리도 없고, 그저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학교라는 공간에서 만큼은 그 민원이라는 말보다 교육공동체의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겠다 싶은데, 그것도 한두 명의 의견으로 학급의 교육활동들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민원 1 주민이 행정기관에 대하여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일
민원 2 백성의 원망
사전을 찾아보니 원래 내가 알고 있던 민원이라는 의미 말고 다른 한자어로 백성의 원망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한참을 웃었다. 학교니까 뭐랄까, 학부모의 원망이라고 해야 할까?
어디서든 원망할 수 있는 것이고, 같은 상황이라도 다르게 느끼는 사람은 지구 곳곳에 늘 살아 숨 쉬고 있는 법이니까 원망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원망이 조금은 아이들의 교육과 연관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나의 분풀이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니 교문밖에서 아이들의 하교를 기다리는 일이 원래도 힘들었지만 더 힘들다. 이 짓을 나만 하는 건 아니고 몇몇 엄마들이 같이 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어쨌든 끝이 정해져 있는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은 모양인지 아직은 할 만하다. 어쨌든 이번 종업식과 함께 아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서 더는 하지 않을 일이고, 심지어는 먼 훗날 그리워할 일이기 때문이다.
뭐든지 끝이 있는 건 사람을 견디게 해 주는데, 그런 면에서 육아와 양육이라는 것은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미치게 하기도 하는 것 같다.
반면에 학년의 끝도 정해져 있기 때문인지 나는 늘 끝이 보이는 학기 말은 어찌보면 조금 더 편안하고 따뜻한 공간이었던 것 같다.
"우리 선생님만 맨날 너무 늦게 끝내주는 거 같아."
"애들 뭐 시키는 게 많나?"
"아, 그리고 무슨 장기자랑 하라던데 뭐 시킬 거예요?"
"뭘 시키나, 노래한다는데, 아휴 내가 하지 말라고 말렸어요. 무슨 노랜지도 모르겠고 하하하"
"우리 애는 개그를 한다는데 기겁했네."
"왜 이런 걸 시키는 거야? 할 것도 없는데."
엄마들이 학교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속 터놓고 지내는 엄마도 없을뿐더러, 가끔 "우리 선생님 엄청 무섭대."라는 말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그동안 엄마들이 담임선생님에게 불만을 품은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은 적도 없었기에 요즘 들어 불만 가득한 짜증 섞인 말들에서 '아, 학기말이구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보통 교실에서는 11월이나 12월쯤 되면 모두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이가 될 뿐만 아니라, 싫은 사람도, 좋은 사람도 다 드러나는 법이라서 심지어는 엄마들도 모르는 아이들의 비밀을 선생님만 알고 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와 담임은 서로 허물없는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없다. 당연하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것 아닐까.
아이를 낳았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또는 개인적인 각자의 이유로 젖먹이를 놔두고 출근해야 하는 엄마 교사들이 있었다. 지금도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그네들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중년교사가 되어버렸지만 마음만큼은 스물네 살이기 때문에 그런 힘든 삶도, 아니면 아이를 놔두고 출근하는 것이 오히려 나들이 나온 듯이 행복하다는 것도 모두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집에 두고 온 엄마 마음이 어디 오롯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게,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킨 엄마 마음도, 잠시의 해방감에 기분이 좋았다가 신경은 온통 교실에 가있기도 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누군가의 괴롭힘은 없는지 궁금한 게 당연하다.
우유만 먹고 누워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는 건 그 시절을 지난 엄마들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매일매일 힘들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아이들은 싸우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하다가 다시 웃고 화해한다는 걸 우리는 다 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 시절을 지났기 때문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없다면 사람은 성장하지 못하니까.
학기말이 되면 아이들과 선생님도 많은 감정이 오고 간다. 그중에서도 정 때려고 저러나 싶을 만큼 요절복통 난리법석인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내가 맡았던 반은 주로 그랬다. 학기말은 학기 초보다 더 자유분방 그 자체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도 잔소리가 많아지고 야단치는 빈도도 높아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건 모두 관심과 사랑이라는 거. 엄마의 잔소리가 사랑이라고 우리가 늘 그렇게 합리화하듯이 말이다.
5교시가 끝났어도 늦게 나오는 아이들은 그곳에서 아직 남은 교육활동을 쓸어 담고 있을 것이니까 불만은 잠시 접어두는 게 어떨까. 우리가 그 시절 젖먹이를 키우던 때를 떠올려보면 알지 않을까, 내가 계획한대로 흘러가지지가 않으니까, 교실에서도 그런 날이 있다는 걸 말이다.
학기말의 시간은 사랑과 잔소리와 불만과 만족감이 공존한다. 끝이 있어서 슬프게도 기쁘다.
<에피소드>
나: 아들, 오늘 왜 늦게 끝났어?
아들 : 늦게 끝났어?
나: 응 너네 반만 10분도 넘게 늦게 나왔어.
아들 : 몰라. 그냥 수업 끝나고 나온 건데.
나 :(선생님이 열정적이시구나. 종 치고도 수업을...) 좋은 선생님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