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부당하거나 불편해도 그냥 내가 해버리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한 삶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건 둥글둥글한 게 아니고 그냥 비겁한 일일수도 있다.
아이들에게는 자기의 의견을 똑바로 말하라고 하면서 정작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래도 때와 장소를 가리면서 말을 하면 좋긴 하겠다.
2교시 수학 풀다가 갑자기 "아, 배고파요." 라던지 3교시 사회 수업 중에 전 대통령 이름을 말하면서 "000은 나쁜 놈이야"라던지.
이런 말은 자신의 의견을 정당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소음일 뿐이다.
소음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교사가 되어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날들을 십 년 넘게 견디고, 엄마가 되어 두 놈이 동시에 말하는 걸 겨우 알아들으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았다. 여리게 생긴 애기 엄마가 3살 정도 된 둘째 아이에게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을 브라운관을 통해 보면서 저거 딱 내 옛날 모습이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 엄마에 대한 비난과 악플이 쏟아질 것을 예상하며 그 비난의 화살은 나를 향한 것과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어릴 때 나도 그랬다. 정말 내가 미친 여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한 마리 미친놈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가 얼굴로 표출되지만 최소한 그렇게 소리 지르지는 않는다. 이건 아이들이 자라서도 아니고 내가 성숙해져서도 아니다. 그저 약 덕분이다.
신경정신과에 다니면서 약을 먹기 시작하고 나의 모닝루틴은 엉망이 되었다. 늦잠을 자고 퇴근하면 또 잤다. 잠자리 독서를 하면서 비몽사몽 꿈을 꾸기도 하고 덕분에 글씨를 이상하게 읽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런 날들이 지나갈수록 나는 점점 소리를 지르지 않게 되었다. 약은 정말 신기한 물질이다.
한번 사는 인생. 참고 사는 일은 허무하다.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그래서 나는 살짝 두통의 조짐이 보이면 바로 타이레놀을 두 알 꺼내 삼킨다. 두통을 참으며 약을 안 먹는 것보다 그걸 먹고 편안한 마음이 되는 게 나에게는 더 중요한 현재 시점이다.
올해 학교에는 부당한 업무지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당하게 끊어내려고 계속 시도하시는 선배교사가 계신다. 타 시도에서 오신 분이라 아마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분의 말씀을 듣고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나는 나서서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저 스무 살 때처럼 역시 비겁하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도 벌써 중견교사가 되었는데 말이다.
후배들을 위해 총받이가 되어주는 멋진 할머니 선생님이 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저 비겁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 지를 수 있다면 그러고도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면, 소리를 지르고 나면 비참하고 더 울화통이 터진다.
사람마다 삶의 가치관이 다른 것을. 할 말도 못 하냐고 윽박지를 필요도 없고, 할 말을 다 한다고 수군거릴 필요도 없지 않을까.
약물의 힘을 얻어서라도 지금의 삶이 평온하다면 나는 영혼이라도 팔 거다.
약을 먹은 지 7개월쯤 되니 다시 새벽기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퇴근하면 뻗어버린다. 내가 뻗어있는 동안 내 아이들은 신나게 유튜브를 보고 게임을 한다.
주섬주섬 정신을 차려가며 저녁밥을 짓는다. "배달음식 시켜 먹으면 안 돼?"라는 아이의 말에 저녁에는 밥을 먹어야지 고기 구워줄게, 로 회유하지만 사실 나도 마음속으로는 배달의 민족을 누르고 싶어 안달이 난다.
국도 없이 김치에 소고기만 구워서 내주고 "밥 싫으면 고기만 먹어"선심 쓰듯 말한다.
참 안온한 저녁시간이다. 소리를 지르지 않은지 3~4개월은 된 것 같다. 물론 중간중간 화를 내고 비난조로 말을 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없어지리라 믿어보려고 한다.
남편은 그 약을 언제까지 먹을 거냐며 은근히 끊으라는 압박을 한다. 아니 왜? 정신과약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편견이 이렇게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