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이어서 더 아름다운 날들
2024년 6월 7일(금)부터 2024년 6월 27일(목)까지 양천구 오목공원 내 오목한 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이소발 작가의 '보통의 날'들은 아티스트가 표명한 대로 소소한 날들의 감사함을 담은 전시이다. 나의 의견을 덧붙이자면 보통이어서 더 아름다운 날들을 화폭에 담은 전시이다.
목동에서 자라며 대부분의 날들을 집주변에서 보내는 작가는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낸 목동에서 아이를 기르며 그림을 그리고 집을 꾸미며 살고 있다. 목동은 말 그대로 서울에서 나무가 많은 지역이다. 1980년대 서울의 도시계발과 함께 심어진 나무들은 어느새 저층 아파트 혹은 연립주택의 높이보다 높이 서서 도심 속에서 자연의 초록색 생명력을 뿜어낸다. 목동에 사는 주민들은 사시사철 각기 다른 컬러감을 보여주는 나무의 잎과 꽃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데, 작가 또한 이러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자신의 삶 속에서 펼쳐지는 일상적인 순환의 흐름을 그림 속에 옮겨 놓았다.
전시장 입구에 붙은 작가의 전시 서문을 이곳에 잠시 옮겨 보자면 아래와 같다.
"어릴 적 나의 보통날은 목동에서 대부분 펼쳐졌다. 나는 목동에서 자라고 컸으니까."
"우리는 매일 보통의 날들을 내 집 주변에서 보낸다. 어느 날은 화가 나고 어느 날은 즐겁고 다양한 감정선과 일들이 펼쳐지면서 삶이 흘러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변의 나무들은 계절에 다라 변해서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기도 하고, 꽃내음을 전해주어서 웃음 짓게도 만든다."
"어릴 적 내가 홀대했던 목동에서의 보통의 날들은, 이제 내게 하루하루가 쌓여 소중한 기억이 된다."
......
"그렇게 표현된 작품들이 모인 이 전시가 누군가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전시 소개를 마친다."
작가의 전시 서문을 보면서 나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첫 문장의 시작과 이곳에서 자라며 살며 미술활동을 해왔다는 점과 이 모든 하루가 소중히 쌓여 추억이 되었다는 소개 글은 내가 성장한 이 지역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거의 동일했다. 어린 시절 두 발 자전거 타기를 처음으로 배웠던 목동아파트의 단지 내 도로에서 나는 처음으로 심적인 그리고 물리적인 성취감을 맛보았고 지금까지 같은 동네에서 30년째 살고 있다. 많은 시간을 한 지역에서 보낸 만큼 다양한 일들이 나를 스쳐갔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건은 목동이라는 학군지에서 주요한 이벤트로 점쳐지는 '대학 진학'이 아닌 바로 '출산과 육아'였다.
내 삶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준 첫째 아이는 태어난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초등학생이 되었고, 많은 풀타임 워킹맘들이 고민하듯 나 또한 육아와 업무의 효율적인 겸업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사직 후 약 1년간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막상 1년을 쉬다 보니 현장에서의 전시기획이 그리워졌고, 어쩌면 독립큐레이터라는 직업은 '육아와 겸하여 나의 시간관리만 잘 한다면 프리랜서로서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 큐레이터라면 글을 써야지'라는 생각에 블로그를 개설했고 미술과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첫 전시평은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오목한 미술관에서 개최된 이소발 작가의 '보통의 날들'을 관람했다. 그리고 이 전시는 최근에 본 전시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깊게 공감한 전시가 되었다.
이소발 작가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삶을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여 종이 위에 표현해냈다. 주부들이 수많은 시간을 보내는 주방을 종이에 혼합재료를 활용해 제작한 '행복한 내 공간', 사람의 감정과 달리 매일 동일한 모습을 유지하는 클래식 가구를 그린 '나에게 행복을 주는 피사체들', 육아의 깊은 터널을 행복으로 승화시킨 '나의 보물'들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행복한 내 공간'에서 보이는 주방은 엄마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며 도마는 이 공간에서 자주 사용되는 사물이다. 착착착 울리는 소리와 함께 칼질된 재료로 아이의 이유식부터 일반식이 완성되는 주방은 행복이라는 감정보다는 노동이라는 키워드로 점철되기 쉽다. 그 노동의 순간에도 나름의 행복들이 배 사장의 모래처럼 잔잔히 존재하기도 한다. 재료를 다듬을 때 주방에서 느끼는 나와 자연의 교감, 설거지를 할 때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 깨끗해지는 경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딱 맞는 그 맛에 도달했을 때의 성취감. 인류의 역사와 수많은 매체에서 주방은 여성노동의 공간이고 이 노동을 해방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방가전이 발명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방에서는 디지털이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 아날로그적인 과정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작가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담아 자연광이 살포시 들어오는 창가의 반짝이는 싱크대와 튤립을 연상시키는 꽃들이 담긴 화병 그리고 햇살에 일광욕을 하고 있는 도마를 그려냈다. 이 장면에서는 고된 가사노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 가사노동이 끝난 이후의 평온함과 개운함이 느껴진다. 엄마들의 일상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공간, 주방에 작가는 행복의 감정을 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행복을 주는 피사체들'에는 기하학적인 도트 패턴의 벽지를 바탕으로 선적으로 배치된 가구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매일매일 변화하는 감정과 달리 가구들은 늘 그 자리에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며 위의 작품을 제작했다. 평면적인 특성으로 19세기 말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일본의 목판화 우키요에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에는 빈티지한 디자인의 가구들과 패턴을 가진 소품과 화병에 꽂힌 꽃들이 등장한다. 액자 프레임 속에 스트라이프 패턴이 프레임처럼 재등장하고 그 안에 가구들이 배치된 실내공간은 이중으로 형성된 프레임 속에 그려졌지만 답답함이 느껴지기보다는 원근법이 사라져 무한으로 확장해나가는 느낌을 준다.'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피사체들'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제공하는 일상의 평온한 감정들은 연속적인 시간의 개념 속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면서 확장되어 간다.
'나의 보물' 속에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세로로 긴 프레임 속에서 보이는 선형의 작품은 마치 창가의 커튼을 열고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를 엿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좁고 긴 형태의 작품은 그 형태로 길고 고단한 육아의 과정을 추상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액자 프레임 내부에 그려진 짙은 커튼 속에 펼쳐진 아름답고 인상적인 장면은 고단한 육아 과정에서 느껴지는 찰나의 기쁨과 심리적인 안정감을 담아내고 있다. 육아는 길고 고되기에 요즘에는 육퇴라는 말도 생겼지만, 육퇴 후에 바라보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세상에서 가장 티 없이 맑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오늘도 나의 보물들이 일찍 잠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매일 반복되는 듯한 평범한 하루의 일상을 유럽 시골 마을의 지도처럼 시각적으로 해석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는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은 작게, 주변 환경은 다채롭게, 평범한 일상이 펼쳐지는 주요 무대인 집은 가장 화려하고 디테일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등장인물 중에 가장 크게 비중 있게 정중앙에 그려진 인물은 아이를 자전거 뒷좌석에 태우고 어딘가로 열심히 가는 엄마이다. 인물은 그림 속에서 아이와 쇼핑을 하고, 연못가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정원의 꽃을 가꾸기도 하며 일상에서 벌어지는 내러티브를 하나의 화면에서 보여준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그림 속의 거주지는 상상의 공간일 수도 있지만 무성한 나무가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는 작가의 실제 거주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자신의 집을 시선을 사로잡는 붉은색 지붕이 있고 외부를 향해 뚫려있는 큰 창이 있는 곳으로 표현한 작가는 거주 공간인 집에 대한 애정이 많고 외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를 작품 속에 녹여낸 듯하다.
'지나가면 그리워질 보통날'들은 마치 영국의 교외 어딘가에 위치한 테라스 하우스에서 펼쳐진 가족 구성원의 일상을 표현했다. 식자재 쇼핑을 하는 인물,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인물들, 혼자 시간을 보내며 책을 보는 듯한 인물들은 하나의 집에서 각기 다른 층에 표현되었다. 이 작품 또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처럼 여러 가지의 내러티브가 하나의 화면에 구성된 작품이다. 작가는 '지나가면 그리워질 보통날'에 대해 특별하게 좋지도,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고 소소하게 펼쳐지는 평화로운 하루의 일상을 담았다.'라고 코멘트를 달았다. 작가의 언급처럼 일상의 대부분의 날들은 특별하게 나쁘지도 좋지도 않게 빨리 지나가는 날들이 연속이다. 보통의 날들은 빨리 지나가고 어렵고 힘들 날들은 더디게 지나간다. 심지어 좋은 날들은 낮과 밤의 시간이 반으로 잘린 것처럼 후다닥 지나간다. 이 모든 날들은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삶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심리적인 거주공간인 집으로 작용한다. 나의 하루와 감정이 농축된 집에서 우리는 기억을 형성하고 축적하고 시간이 지나 이를 그리워할 때 기억은 어떠한 형상, 빛깔로 기억되곤 한다. 작품의 양 끝에는 반이 잘려나간 듯한 울창하고 높은 나무들이 그려져있다. 인물들과 함께 한 장소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자신들만의 속도로 성장해온 나무가 화면의 가장자리에서 작품을 에워싸고 있다.
막연 바라는 소원에 대한 욕망을 담은 '실현돼야 할 욕망'은 도시 속에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인물의 갈망을 꽃밭에 굳건한 두 발을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빨간 구두를 신고 있는 인물의 발은 에폭시로 코팅되어 특유의 마티에르를 뽐내며 반짝이는 빛을 내뿜고 있다. 이는 꿈에 대한 갈망과 욕망이 조형적으로 강조된 모습으로 작가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도 꿈은 있고 이에 대한 의지는 굳건하다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는 부모의 수많은 시간과 노력과 희생이 필요로 한다. 나를 위한 꿈은 잠시 접어두고 육아에 집중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속에 담아둔 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장 펼쳐질 수 없기에 꿈에 대한 욕망은 나의 세계에서 더욱더 권고해진다. 작가는 '실현돼야 할 욕망'을 통해 아직은 꿈을 향해 발을 떼지 못하고 있지만 그 의지는 무엇보다 강하고 미래를 향한 그 길이 꽃밭일 것임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시의 말미에 있는 방명록을 쓰는 코너는 아티스트의 책상처럼 재현되어 관람객들에게 전시를 보고 느낌 감상을 적도록 유도하고 있다. '방명록을 써주세요'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진 않지만 기하학적인 문양 위에 올려진 클래식한 카키색의 콘솔에 담긴 농축된 시간들은 관람객이 이곳에 앉아보도록 인사를 건넨다.
전시장 입구에 위치한 체험존과 포토존에서도 자신만의 나무를 그려 소장할 수 있고 이를 들고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이소발 작가는 아티스트이자 엄마인 자신의 일상을 덤덤하게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일상적인 노동과 감정도 소중하고 아름답다'이다. 많은 매체와 인터넷상의 댓글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아름다운 시선보다 더 손쉽게 그리고 자주 발견된다. '맘충'이라는 단어가 그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표현과 각자 의견을 가질 자유가 있기에 '맘충'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을 공격할 마음은 없다. 그들도 어딘가에선가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기에 그런 표현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소발 작가는 엄마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소중함과 찰나의 감사를 다채로 색깔과 다양한 재료를 혼합하여 드러내었다. 전반적으로 화사한 느낌의 화풍은 소중함과 아름다움이 스며든 일상을 관람객들이 일차적으로 시각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곧이어 이를 감정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바로 이 점이 이소발 작가의 전시 '보통의 날들'이 보통이어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일상이 주는 감동은 색채를 띠고 있는 형상으로 인지하기가 어렵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순간들을 모아 컬러풀한 작품으로 제작했고 이 작품들은 인위적인 화려함보다 공감대가 깊은 감정들을 담아내고 있기에 관람객들에게 전시를 관람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종종 드는 생각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이다. 아이를 키우며 나도 함께 성장하지만 그 가운데 진정으로 부족한 나의 일면을 마주하거나 일과 육아 사이의 끝날 것 같지 않은 소용돌이 속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등 잔잔히 일상을 뒤돌아 보면 삶은 대체적으로 위로를 먼저 건네기 보다 나의 부족한 점을 먼저 제시하곤 한다. 이소발 작가의 작품이 가진 따뜻한 화풍, 작품을 구성하는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알록달록 다양한 색상으로 투명하게 채색된 형상들은 동시대의 수많은 엄마들에게 '당신의 삶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따뜻한 위로를 해준다. '보통의 날들' 전시를 보면서 예술은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위로와 격려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인지 오목한 미술관을 찾은 중년 여성들이 작품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그림이 너무 예쁘다."라며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전시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육아의 일상을 헤쳐가는 엄마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전시이다. 전업주부나 워킹맘의 구분 없이, 엄마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전시장에서 이소발 작가의 작품과 함께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이소발 작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sobal_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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