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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의자 Jun 24. 2020

번역으로 읽는 <삼국지연의>

김구용 역

오랜만에 <삼국지연의>를 읽었다. 처음으로 ‘삼국지’를 접한 것은 아마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지금은 번역자(혹은 작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세로쓰기로 된 서너 권짜리 책이었다. 분량으로 보아 축약본인 것이 분명한데 어린 나는 그마저 복잡하여 내용 이해에 어려움을 겪었다. 완독을 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중학교 때인가 박종화 ‘삼국지’를 읽었다. 역시 서너 권짜리였는데 완독한 것 같긴 한데 다 읽었다는 그 사실만 기억에 남아 있다.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읽은 삼국지는 고우영의 <만화삼국지>였다. 그림으로 만난 삼국지 캐릭터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귀만 큰 욕심쟁이 유비, 긴 수염의 점잖은 관우, 여성스러운 외모의 제갈량 등등. 장비는 특히 욕을 잘했다. 소설에 나오지 않는 야한 이야기나, 만화가의 재치 있는 비평도 재미있었다. 이후에 읽은 게 이문열의 평설 <삼국지>였다. <삼국지연의> 중에서 흥미 있는 부분은 상세히, 그렇지 않은 부분은 간략히 편집한 책이었다. 말하자면 새로 쓴 ‘삼국지’인 셈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을 근거로 썼는지 알 수 없는 ‘족보 없는’ 책이다.      


그리고 드디어, <삼국지연의>를 가장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김구용의 번역본을 다 읽었다. 이 책의 저자 나관중은 원말명초 사람이다. 저본으로 알려진 진수의 <삼국지>가 쓰인 지 천년 후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모두 개인의 창작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당, 송, 원 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수많은 ‘삼국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나관중은 그것을 잘 정리한 작가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로 보는 <삼국지연의>는 나관중 본을 청나라 사람 모종강(毛宗崗)이 편집한 모본이다.   

   

김구용 번역 <삼국지연의>는 총 10권 120편으로 되어 있다. 문체가 그리 유려하다 할 수는 없지만 고전의 맛을 느끼기에는 좋은 번역이었다. 과한 수식이나 이해 안 되는 만년체의 문장이 없어서 좋았다. 작가의 개입이 적고 묘사가 간결하여 다른 ‘삼국지’에 비해 사건 전개의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서문에서 김구용은 ‘한 자도 놓치지 않고 번역하였다’고 썼는데, 신뢰할 만한 자부심이라 생각했다. 전에 보았던 ‘삼국지’들과 다른 점은 형식만이 아니었다. 우선 평설이나 축약본에서 보기 어려운 공명 사후의 이야기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핵심 주인공이 아닌 여러 인물을 상세히 다룬 점도 좋았다. 예를 들어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촉나라 강유와 그를 막으려는 위나라 등애의 오랜 싸움은 다른 판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다. 사마염의 진晉이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 역시 그렇다.      


조선시대 이후로 우리가 수용한 삼국지는 �삼국지연의�의 촉 정통론을 따르고 있다. 이는 진수의 <삼국지>가 위 정통론에서 쓰인 것과는 다른 점이다. 촉 정통론은 충과 의를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유비가 자신이 황족이라고 자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정통론과 무관하지 않다. 아무리 승자라 해도 조조(조비)나 사마염은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반역자들이다. 촉 정통론은 성리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데, 그 시작에는 남송의 유학자 주희(주자)가 있다고 한다. 

      

우리만큼 삼국지를 좋아하는 일본에서는 조조에 대한 평가가 후한 편이다. 조조를 단순한 간웅이 아니라 능력 있고 실리를 중시하는 인물로 본다고 한다. 대표적인 작가가 요시카와 에이지인데 그는 <삼국지연의>를 원본으로 개작한 역사소설 <삼국지>에서 조조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시도했다. 그의 작품이 가진 영향력은 대단해서 우리나라의 삼국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나관중의 작품과 달리 유비가 차를 사러 갔다가 황건적을 만나 봉변을 당하는 데서 <삼국지>를 시작한다. 이 작품 역시 번역이라기보다 평설이었던 모양이다.  

    

황석영의 <삼국지> 역시 모종강본을 번역했다고 한다. 실제 김구용 본과 분량과 목차에서 큰 차이가 없다. 물론 김구용 본보다 훨씬 더 현대적인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삽화 역시 고전 삽화를 쓴 앞의 책과 달리 황석영 본은 색이 들어간 최근 그림을 사용하고 있다. 전 권을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독성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황석영 본은 ‘번역’에 대한 뒷이야기가 좀 있는 것 같다. 번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말이다.     

 

한 평론가는 삼국지는 인생의 교과서라고 했다. 처세술을 위한 교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에서 대단한 인생의 교훈이나 처세술을 배울 생각은 없다.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족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과 무관하게 현대의 <삼국지>는 매우 영향력이 큰 문화콘텐츠이다. 역사에서 소설로 소설에서 만화, 영화, 게임으로 매체를 달리하면서 많은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조차 길고 지루한 소설을 <적벽가>나 <화용도>로 바꾸어 향유한 바 있다. 앞으로 ‘삼국지’ 이야기가 무엇을 만들어낼지, 어떻게 변화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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