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마르칼
유럽의 중세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기사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호숫가의 아름다운 성, 높은 성벽을 타고 오르는 공성전, 갑옷을 입은 말 탄 기사, 엑스칼리버나 사자가 그려진 방패를 먼저 이야기할지 모른다. 어떤 인들은 축축하고 어두운 숲, 지팡이를 든 마법사, 수도원의 성직자, 움막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가난한 농부들, 거인과 난쟁이를 상상할 수 있다. 게르만족의 이동이나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페스트의 창궐 같은 주요한 사건을 먼저 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아마도 영상 매체를 접하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의 미니 시리즈에는 이교도에 맞서는 영웅이나, 영주들의 전쟁, 마법사와 싸우는 기사들이 자주 등장한다. 마귀나 악령 또는 마법사들에 대항해 인간을 구하는 사제들, 영주들이나 침략자들의 착취에 힘들어하는 농민들, 떠돌이가 되어 이리저리 헤매는 부랑자들, 숲속에 들어가 도적이 된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우리에게 조선 시대나 고려 시대가 그렇듯이 서양 사람들에게 중세는 자신들의 과거이고 뿌리이다. 그들에게 중세 이야기는 일종의 사극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중세 이미지는 과거가 아닌 현재나 미래를 다룰 때도 사용된다. 판타지나 SF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가끔은 중세 기사를 연상하게 한다. 이런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물론 마법의 지팡이를 꺼내거나 광선 검을 휘두르기까지 한다. 현대화된 주택이 아니라 돌로 쌓은 듯한 성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경우도 많다. 모바일 게임에서 중세를 연상하는 인물과 배경을 사용하는 일은 더 흔하다. 아예 배경을 과거로 설정하는 것은 물론 등장하는 캐릭터에 중세 인물의 이름과 특성을 부여하는 일까지 있다.
이처럼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는 중세 콘텐츠 중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이다. 넓은 의미의 아서 이야기는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 아서의 궁정 이야기, 성배 이야기를 포함한다. 아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이전에는 기사 계급에 대한 분명한 이미지도 기사도라는 단일한 행동 규범도 없었다. 우리가 아는 기사 혹은 기사도는 아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력 기사나 마상 시합, 궁정식 연애와 같은 잘 알려진 소재들도 아서 왕 이야기를 통해 퍼져 나갔다.
그런데 중세적 판타지의 원형을 이루고 있음에도 아서 왕 이야기는 하나의 권위 있는 원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수 세기에 걸쳐 창작된 다양한 판본이 현재 남아 있으며, 그것들은 서로 다른 출전에서 나온 수많은 일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는 마법사 멀린과 요정 모르간, 어부왕과 성배전설, 명검 엑스칼리버, 귀네비어 왕비와 란슬롯의 사랑,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 등의 매혹적인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판본이 늘어나면서 등장인물의 숫자가 늘어나고 이전 이야기와 모순되는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작품의 배경 역시 아서의 고향 브리튼에서 더 넓은 유럽 지역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장 마르칼이 쓴 소설 <아발론 연대기>는 10세기 이상 전승되어온 아서 왕 관련 이야기를 종합한 작품이다. 시간적으로는 색슨족의 브리튼 섬 침략부터 아서 왕의 죽음까지를 다루며, 브리튼 섬과 브르타뉴 지방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전체 8권 분량인데, 1권 ‘마법사 멀린’부터 2권 ‘원탁의 기사들’, 3권 ‘호수의 기사 란슬롯’, 4권 ‘요정 모르간’, 5권 ‘오월의 매 가웨인’, 6권 ‘성배의 기사 퍼시발’, 7권 ‘갈라하드와 어부왕’, 8권 ‘아서왕의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장점은 기존에 나온 수십 권의 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하여 통일성 있는 줄거리를 엮었다는 점이다. 기왕의 텍스트에서 독립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자기 개성을 온전히 유지한 채로 큰 줄거리 안에서 자기 몫의 역할을 한다. 다만 이 책은 브리튼이나 아일랜드 텍스트보다 브르타뉴 지역 텍스트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발론 연대기>의 주제는 매우 다채롭다. 브리튼 섬의 역사나 켈트족의 전통, 아서 왕 이야기의 판본, 성배 전설의 유입과정, 궁정식 연애의 의미 등에 초점을 맞추어 읽을 수 있다. 켈트 문화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주권 여성이나 드루이드, 기독교의 영향이라 할 수 있는 어부 왕과 성배 탐색의 의미에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등장인물 각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읽는 것도 좋다. 아서 왕 이야기의 매력은 전체 줄거리가 아니라 독자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 개성 있는 인물들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