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드포 Mar 13. 2020

잘 가요, 나의 보스

나의 '보스'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주말이면 대형서점에 가서 새로 나온 책들을 모조리 사들이고, 평일에는 온라인 서점을 통해 쉬지 않고 책들을 주문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다 읽지 못할 만큼 많은 책들을. 그런 이유로 나는 수시로 보스의 책상에 쌓여있는 책들을 치워야 했다.


보스와의 첫 인연은 벌써 12년 전, 

당시에도 지방대 졸업을 앞둔 청년에게 취업이란 쉽지 않은 관문이었다. 다행히 이제 막 성장하는 어느 중소기업의 회장이 평소 알고 지내던 지방대학 교수에게 신입사원 채용 소식을 알렸고, 그 교수님은 다시 우리 학과장 교수님께 학생 추천을 부탁했다.

그렇게 26살, 4학년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8월에 나는 어느 중소기업의 면접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신입사원 채용임에도 이례적으로 부서장이 아닌 보스가 직접 면접을 봤고, 그 자리에서 합격 통보까지 받았다. 

뼛속부터 촌놈이었던 나는 그렇게 서울의 강남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혼자뿐인 기획팀 소속인 나의 주요 업무는 거의 비서와 같은 것들이었다. 보스는 밤낮, 주말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연락해왔고, 그때마다 사원인 내가 처리하기엔 거의 불가능한 요구들을 해댔다.


나의 직장생활은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듯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사무실 바로 옆에 있던 지하철역은 내가 퇴근하기도 전에 잠들곤 했다. 그렇게 쥐꼬리만 한 사원 월급 대부분을 택시비로 사용하면서도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도저히 돈이라는 걸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이 지나 사원의 꼬리표를 떼고 주임, 대리, 과장, 차장. 하나씩 얻을 때마다 훈장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낙인에 불과했던 수식들. 대부분이 보스의 꼭두각시처럼 살아온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 잠도 못 자고, 밥도 거르며 일에 매달렸을까. 하지만 그런 나의 희생도 한몫 거들었던 것일까? 작은 규모였지만 매년 몇 배, 몇십 배의 성장을 거듭하는 회사가 되었다.

물론 계속되는 성공은 없었다. 예측하지 못했던 여러 위기와 잘못된 선택들을 해온 보스는 점점 사업가로서의 총명함을 잃어갔고, 결국 얼마 전 자신이 의형제로 생각할 만큼 친했던 사람에게 경영권을 뺏기고 물러났다. 새로운 보스의 등장으로 회사는 하루하루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들이 벌어졌고, 모르는 사이에 나 역시 과거 보스의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정리해고로 떠나는 동료들, 그리고 새롭게 영입되는 보스의 사람들, 과거의 방식은 잘못됐다고 말하는 그들과 융화되어 회사를 위해 다시 한번 뛰어보라는 권유들. 눈감고도 알았던 이 회사의 모든 게 정말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꼴을 당하려고 지난 12년을 보스에게 충성했던 건 아니었는데, 내심 보스를 원망하며 보낸 시간들.


한 달 전, 

창고에서 갑자기 떠나버린 보스의 짐들을 찾았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손대지 않을 것 같아 그 박스들을 열어보았다. 박스마다 한 번 읽지도 않은 깨끗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을 버리고 그중 보고 싶은 책을 한 권 골라 두었다가 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노하우가 정리된 그 책을 읽어가던 중 발견한 163~165페이지에 쳐져있는 밑줄. 새책인 줄 알았는데 보스가 읽었던 흔적이 있었다.


"두려움과 불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을 너무 타인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며 당신에게 화를 낸다고 해보자. 그는 당신의 이해 부족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자신의 불안 때문에 당신에게 못 되게 구는 것이다."

책을 읽다 밑줄을 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도 그렇다는 뜻일까. 누군가를 끊임없이 긴장하게 만들었던 보스 자신도 항상 두렵고 불안했던 것일까. 이해하지 못한다고 소리치며 화냈던 것은 자신이 이해받지 못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 모든 게 내면에 감춰진 그의 진정한 모습이었을까. 정말 보스가 그랬다면 나와 참 많이 닮은 사람이었을 텐데, 그럼 나와 좀 더 친근하게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보스의 수많은 책들을 버리면서도 나는 왜 그 책 한 권을 골라 읽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10여 년을 곁에 두었던 꼭두각시에게 간다는 인사 한마디 못한 게 아쉬워 준비한 나름의 인사였을까. 나는 밑줄 쳐진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그리고 종이에 직접 손으로 써본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던 보스가 쭈뼛쭈뼛 내게 말을 건넨다. 


"전 차장, 정말 조금만 더 견디면 내 곁에서 고생한 보상을 꼭 해주려 했는데..."


아닙니다. 보스. 그간 곁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분명 다시 누군가의 보스가 되실 거예요. 당신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분이니까요. 잘 가요, 나의 보스.

작가의 이전글 지키지 못할 약속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