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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끌림이 있다면 해보세요.
그래야 알지요.

남원시 산내면 감꽃홍시/목화로부터/찬장과 책장 운영자 조회은님


끼이이익 하는 소리가 나는 대문을 밀고 <감꽃홍시> 마당에 들어서니, 두 채로 구성된 고즈넉한 한옥집이 눈 앞에 펼쳐졌다. 마당엔 당시 높은 파값으로인해 일명 파테크라고 불렸던 파밭이 있었고, 또 그늘진 곳 한켠 참나무 둥치에서는 버섯이 피어나고 있었다. 안채로 들어서니 알록달록한 실들과 작품과 어우러진 베틀이 두 방을 차지하고 있었고, 바깥채에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가득한 아담한 동네책방 <책장과 찬장>이 있었다. 보자마자 내 장바구니에 마구 담고픈 소품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새로 들어온 책들을 살펴보고 있는 주인장의 너무 여유로운 모습이 참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저분도 한때는 나와 같은 서울에 살았었다는데... 어떻게 지금 이런 삶이 가능해진 걸까?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을까? 아님 타고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일까? 지금 이 모습을 선택한 그 용기의 근원은 무엇일까? 마음속 물음표가 끊이지 않았다. 



대문을 열기 전까지는 몰랐다. 내가 어떤 모습을 마주하게 될지, 어떤 분의 삶을 엿보게 될지...


시골살이의 시작


안녕하세요. 지리산 밑 산내면에서 살고 있는 조회은입니다. 저는 경남 진주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대학생활과 5년여간의 시민단체 활동 후 2007년에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처음 왔을 때는 일자리를 구해서 내려와서 지리산 둘레길을 만들던 단체(사단법인 숲길)에서 일하며 입석마을에서 4년여간 살다가 이곳 <감꽃홍시>로 이사 왔습니다. 숲길에서 3년 정도 일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좀 더 자유로운 시간과 생활을 위해 지역의 삶을 결정했던 그  동기와 다르게 이곳에서도 여전히 9-6로 일하고 있잖아?' 그것을 발견하고는 전 바로 시간에 얽매이는 정규직 일자리는 그만두었어요. 어쩌면 이곳에 익숙해지고 나니, '정규직으로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용기가 생겼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소속된 곳(籍)이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후에는 초등학교 방과 후 교사, 국립공원 사무실 계약직으로 일하며 내가 더 원하는 여유로운 시간 등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의외로 일 년 중 쉬었던 기간은 한두 달이 채 안되고 꾸준히 일을 하고 있긴 하더군요.(웃음)


자연과 환경이 제 삶의 키워드였어요. 


시작은 대학시절 동아리가 농(農) 동아리였어요. 학회도 녹색평론 등을 읽고 나누는 학회였고요. 학기 중에는 환경 이슈를 배우고 토론하는 활동을 하고 주말이나 방학 중에는 농활을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졸업 후 환경단체에서 일해보고 싶은 마음, 시골 가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제 안에 자리 잡은 것 같아요. ‘시골이 살기에 더 좋은 것 같아’라고요.

환경단체에서 일하면서 산림생태, 백두대간팀 등에서 일하며 오대산/지리산에 매력을 느꼈고요. 나는 이 두 곳 중 한 곳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오대산은 강원도라 너무 추웠던 반면에 지리산은 기후환경이 더 좋았죠. 지인 중에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일하거나 이 지역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선배들도 있어서 지리산으로 마음이 더 기울었던 그때 즈음 이곳에 지리산 둘레길을 만드는 단체가 생겼고,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서 이곳에서의 삶이 시작되었어요. 


실은 오랫동안 꿈꾸었던 게스트하우스 호스트

이 마을에 내려와 처음 살았던 집이 방 개수가 여유롭고 화장실도 2개인 구조였어요. 첫 게스트하우스는 저의 하우스 메이트가 떠나면서 남는 공간을 활용해 보고자 하는 구상에서 시작되었죠. 둘이 지불하던 연세(지방의 주택/공간 임대는 월세가 아닌 연세인 경우가 많다)를 저 홀로 내기가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때 제가 둘레길 조성하던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 보니, 둘레길 걷는 여행객들에게 이런 민박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시작했는데 첫 해에 연세 벌이가 가능해지고, 둘째 해에는 그 이상의 벌이가 가능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집을 옮겨야 하는 때가 되고, 이 <감꽃홍시> 집과 여러 인연이 닿으면서 이 집을 덜컥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과는 신기하게 첫 만남부터 계약과 재원 마련 등의 타이밍이 딱딱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렇게 내 집이 생기고 나니, 이곳에서 내 마음대로 집을 고쳐 가면서 게스트하우스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 졌어요. 어떻게 그렇게 결정이 쉽냐고요? 생각해보니 제가 게스트하우스를 마음에 품은 건 대학시절부터였더라고요. 휴학하고 떠났던 해외여행 중 민박 경험이 좋았어서 '나도 해봐야지' 하는 바람을 마음속에 늘 품고 있었어요.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해본 거죠. 저는 이렇게 원하는 것을 마음속에 계속 저장해 놓았다가 상황이 되면 액션! 하며 실행으로 옮기는 성향인 것 같아요. 




게스트하우스 <감꽃홍시> 안채에 자리잡은 직조작업장 <목화로부터>의 요모조모


게스트하우스 → 직조 작업실 → 책방으로 이어지고 엮어졌던 과정들


이 곳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던 중 남편을 만나고, 결혼 후 5년 정도 타지로 나가 살았어요. 그때 직조를 배우게 되었는데 너무 재밌고, 그 작업이 명상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래서 평생 취미로 삼으려고 중고 베틀을 사서 직조를 시작했는데요. 다시 산내에 들어오면서는 이곳 <감꽃홍시>가 아닌 다른 곳에 살림집을 구하고, 그로 인해 비어진 안채에 베틀을 넣고 직조 작업실을 꾸몄어요. 또 그참에 별채도 털어서 평소 하고 싶었던 책방으로 새단장을 했지요. 산내면 내에 동네책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책방은 많으면 좋은 거잖아?" 하면서요. 그래서 현재의 게스트하우스 <감꽃홍시>, 직조 작업실 <목화로부터>, 동네책방&소품가게 <찬장과 책장>이 완성되었습니다. 저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이 공간이 참 아기자기하고 노즈넉하다며 좋아해주시고 제 마음도 그래요. 가장 마음이 편한 것은 이곳에서의 수입으로 임대료를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는 점이지요. 근데요.. 전 또 마음 한켠에 또 다른 바램을 품고 있어요. 이렇게 골목 안에 포옥 들어와 있는 공간이 아닌, 동네를 지나는 누구에게도 잘 보이는 공간에 대한 로망이죠. 제가 좋아하고 다른 분들이랑 나누고 싶은 책, 소품, 베틀 등을 한 공간에 놓아두고, 책도 팔고 이쁜 소품도 팔며 직조 작업도 하는 공간을 큰길가에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요. 흐흐 그래서 저는 마을을 오가는 중에 이런 공간을 찾느라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답니다.   


자연놀이 기획자, 직조 작가, 책방지기, 소품 장수, 게스트하우스 호스트로서의 루틴을 말씀드리면요. 월요일은 자유 시간입니다. 고정적인 스케줄을 잡지 않고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시간을 보냅니다. 화요일에는 오전에는 마을 동아리 <자연놀이터 , 그래> 모임을 합니다. 동네를 걸으며 ‘무슨 꽃이 피었나? 이 나무가 어떻게 변했나’ 등을 관찰하고 나누죠. 한 달에 한 번은 타 지역으로 가보기도 하고요. 화요일 오후에는 실상사 작은 학교에서 수공예 수업을 합니다. 원하는 학생들이 직조, 발도로프 인형 만들기, 옷 짓기 등 중에 선택해서 참여해요. 우리 직조 수업에는 6명 정도의 학생이 참여하고요. 예전에는 이곳 직조 작업실 <목화로부터>에서 수업을 했었는데, 학생 입장에서 보면 교내에 작업 공간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안 쓰는 베틀 2대를 제가 기증하고 또 학교 측에서 1대를 더 구입해서 직조 작업실을 꾸몄어요. 그래서 이제는 아이들이 원하면 언제든 직조를 할 수 있는 그곳에서 제가 교육도 합니다. 수목금토요일은 게스트하우스 <감꽃홍시>와 책방 <찬장과 찬장>을 운영하며 가꿉니다.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고요. 


제 하루의 일과는 아침에 일어나 조식 후 집 마당을 둘러보며 꽃들을 감상하는 것으로 시작해요. 봄에는 물론이고 계절마다 다르게 피는 꽃과 나무 하나하나를 만납니다. 그러다 버섯이나 나물 등을 발견하면 캐서 먹기도 하고요.  그러곤 책방으로 내려와 책과 소품 등을 주문하고 게스트하우스 청소와 정리 등을 합니다. 손님들과도 삶을 나누는 대화도 하지요. 요새는 또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는데요. 이 곳 마당에서 주말 플리마켓을 열어볼까 해요. 그걸 위해 빈티지 그릇 등을 모으기도 하고 안 쓰는 물건 등을 정리하며 행복한 상상 중입니다. 마당에 듬성듬성 자리하면 방역수칙의 거리두기도 지키면서 동네이웃들과 '앞마당 플리마켓'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책 큐레이션이 너무 좋아서, 소품들이 너무 예뻐서, 이 곳을 방문한 첫날 내 장바구니는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명. 암. 을 모두 드러내고 마주하며 서로에게 비빌언덕이 되어주는 산내마을 


이곳 남원시 산내면은 실상사, 지리산 생명연대, 한생명 등이 있고 지역 커뮤니티가 탄탄하다고 소문이 나서 ‘귀농의 메카’라고 불립니다. 요새 한국의 시골답지 않게 젊은이들과 새로운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기 위해 이주해오는 것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 덕분에 마을의 역동도 활발하지만 불협화음도 갈등이 거셀때도 있지요. 다만! 우리 지역의 다른 점을 이야기해 보자면, 지역 안에서의 문제와 갈등들을 한 방향으로만 몰아가거나 수면 아래로 덮어버리지 않고, 커뮤니티 안에서 공론화를 시킨다는 점 같아요. 문제를 누구 한사람 것으로 혹은 그 자체로 내버려 두지 않고 '우리의 더 나은 선택'으로 만들고 찾아보는 노력들을 하지요. 귀촌생활의 명암에 대해 밝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해결방안을 논의하고, 이를 위해 행동하면서 지역 안에서 자정 해가는 힘이 있어요. 예를 들어 보자면, 수개월 전에서 7~8명의 청년들이 이 곳에서의 삶을 경험해보겠다고 들어왔던 ‘생명평화대학’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그러자 주최 측에서는 올해 대학운영은 중단하겠다며 학교 문을 닫아버렸죠. 하지만 마을의 몇 어른들은 생각했어요. 1년의 삶을 계획하고 이곳에서 뭐라도 해보겠다고 내려온 청년들을 그렇게 되돌려 보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요. 그래서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더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청년들을 위해 생활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이들에게 계속 이 마을에 있어도 좋은 환경과 자원들을 함께 연결하고 마련해 주었어요. 청년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준 셈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경험을 했던 청년들은 이후 유사한 상황을 겪게되면 그들이 또 다른 이들의 비빌 언덕이 되어 줄 거라고요.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것이 이곳 산내면 마을 공동체의 힘인 것 같아요.

또 우리 마을에는 주민들의 동아리가 60~70개나 된다고 해요. 제 화요일의 일정을 차지하는 <자연놀이터, 그래>도 마을 동아리 중 한 가지이고 그 밖에 동아리들이 수도 많지만 내용도 참 다양한데요. 제가 짐작하는 그 이유는 귀촌한 사람들의 관심사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에요. 또 강당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남원시의 문화활동지원비 등이 강사 초빙비로 쓰일 수 있는 불씨가 되지요. 그런데 그 불을 지피는 것은 이 지역의 원주민과 새로 이주한 귀촌민이 서로를 분리하지 않고 어우러지는 문화에요. 그런 문화가 참 좋습니다.


그 마음이 들 때, 내려와요! 당장!


누군가에게 지역에서 삶을 꿈꾸고 있는데 내게 조언을 구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해줄 거예요. 시골에서의 생활을 선망하면서도 겁이 난다고요? 그 두려움의 내용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생활이라는 점일 거예요. 이제까지의 도시에서의 삶과 너무 다를 것 같은 막연함도 있을 수 있고, 많이 다른 환경에 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생각해보고, 지역에서는 과연 그것을 계속하거나 대체할 수는 없을까를 생각해 보기를 권해요. 예를 들어 백화점 없이 못 사는 친구에게 제가 ‘여기 지리산은 백화점은 없어. 하지만 자연이 참 좋아~ 그러니 너도 살러 내려오렴’이라고 얘기하면 설득도 어렵고 현실성이 떨어지겠죠. 반면, 저 같은 경우는 그렇게 자문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던 빵집 투어, 수입맥주 등은 더 이상 안 해도 되겠다는 결론이었어요. 하지만 그 중에서 포기가 안 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도시에서 누리던 독립 예술전용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이었어요. 지금과 같이 OTT 서비스를 통해 내 집에서도 최신 영화들을 볼 수 있는 환경이 완비되기 전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저는 그 필요에 대한 대체안으로 <씨네 21> 정기구독을 시작했어요. 전처럼 극장에 자주는 못 가지만 영화 잡지를 보며 최신 영화에 대한 소식과 정보들을 누리며 그 필요를 채웠지요. 

서울이나 대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의 삶을 구상하는 분이 있다면, 이렇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먼저 손꼽아 보시고, 살고 싶은 지역의 규모와 요건들을 정해서 그곳들을 둘러보세요. 그 과정에서 지역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발견하다 보면, 그곳에서의 삶을 시작해볼 수 있어요. 우리 인생의 앞길에 어떤 상황이 놓일지 모르는데 이주 한 번으로 그곳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부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안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저도 이 <감꽃홍시> 집을 매입할 때 주변의 그런 기대가 있었는데요. 저 또한 매우 부담스럽더고요. 이 마을에서 수년을 살아봤고 이 마을을 좋아하는 저였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저는 시골에서의 삶을 꿈꾸는 분들이 있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마음이 있다면 해 보세요. 그래야 확인이 되지요. 살다가 아니면 다시 돌아가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도 괜찮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찬장과 책장> 에 전시된 그림엽서 중 하나인데, 이 문구에 그냥 마음이 좋아졌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저 같은 경우는 서울에서 귀농학교를 다녀봤어요. 그곳에서 저는 지역에서의 삶에 대한  마음가짐을 배운 것 같아요. 시골에서의 환경은 도시와는 많이 달라요. 대표적으로 의료, 교육시설 등이 적죠. 그렇지만 대체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에요. 보건소가 있고 대안학교가 있으니까요. 귀농학교마다 프로그램이 다르니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각각의 차이를 구분해보고 참여해보시는 것을 제안드려요. 뭐 요새는 유튜브 콘텐츠도 다양하니 그곳에서 학습하셔도 되고요. 혹여나 아무 준비 없이 내려오셔도 살다 보면 옆집 이웃이 언제 뭐를 심고 먹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만 관찰하고 따라만 해도 다 살아진답니다. 내가 꿈꾸는 삶을 앞서서 잘 살고 있는 이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나보면 나도 익힐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귀농학교를 다니던 그때도, 지금 이곳에서의 삶에서도, 생각을 바꾸면 가능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 선배들의 삶에서 직접 확인하고 있어요. 이렇듯 “삶에서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라기보다는 소프트웨어이다”라는 점을 지금도 매 순간 확인하고 또 체득하며 살고 있습니다.




조회는 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 눈에 너무 아름다웠던, 아기자기하고 자유로운 그 삶이 더 귀하게 여겨졌다. (내가 섣불리 짐작했던) 태생적 자유로움, 순간의 충동, 혹은 운명적 계시로 인한 것이 아닌, 살아온 시간 내내 자신에게 문답을 계속해온 결실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부 나도 시작해보자. 너무 진지하게만 묻다가 그 무게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나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물어봐 주자. 나라는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나? 그 좋아하는 많은 것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선택하고 채울 수 있을까? 그 선택을 위해 내가 놓아야 하는 것도 있겠지. 그것은 무엇이지? 그래도 괜찮나? 아니, 놓지 않고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나는 그것이 좋은가? 등을 계속 물어봐 주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잊은 채 매일의 일상에 쫓기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정리 by 함성
사진 by 올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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