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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소유 May 02. 2024

육아의 풍경

ㅡ문태준 시인의 <젖 물리는 개>를 읽고

  가슴이 작아 콤플렉스였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주눅이 들곤 했다. 괜한 자존심에 과하게 표나는 가슴뽕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때는 있는가 보다. 심지어 가슴조차도. 가슴 본연의 기능이랄까, 사명이랄까, 어쨌든 그만의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모유 수유를 하면서부터 말이다.


  나의 가슴은 작은 대신 참젖이라는 타고난 재능으로 이미 튼실하게 태어난 두 딸을 더욱 올차게 키우는데 이바지했다. 그 탓에 우리 딸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남동생의 딸은 지극히 평균의 몸무게로 나고 자랐음에도, 올케는 우리 엄마에게 “와 이리 약하노, 많이 좀 먹여라.” 소리를 들어야 했다.

 

 큰아이는 너무 올차게 크는 바람에 돌도 되기 전에 몸무게가 14kg를 넘었다. 소아과 담당 선생님은 당장 젖부터 끊으라 했다. 밤이면 한두 시간마다 깨서 내 가슴팍에 파고들어 젖을 찾는 아이 때문에 늘 쪽잠을 자야 했던 나에게 반가운 처방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품에 폭 안겨들어 젖을 쪽쪽 는 아이와의 형용할 수 없는 둘만의 유대감을 끊어내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양쪽 가슴에 반창고부터 붙였다. 아이가 내 윗옷을 들출 때마다 나는 “엄마, 아야 해”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는 부여잡은 옷깃을 덮어주면서도 못내 아쉬워했다. 내 가슴과 눈을 번갈아 보던 아이의 서글픈 눈빛에 대한 기억은, 아마 그때 내 마음의 투영이었을 것이다.


  힘들긴 해도 반창고 두 개로 젖을 떼었던 첫 아이와 달리 둘째는 젖에 대한 애착이 더 강했다. 배가 고플 때는 물론 심심할 때도 내 품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젖을 물고 빨며 놀았다. 밤마다 깨서 젖을 내놓지 않으면 하도 징징거리는 탓에 가슴을 아예 내 몸이 아닌 독립된 기관이라 여기고 잠드는 게 편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젖을 떼야 한다고는 늘 생각하면서도, 그 과정이 두려워서 뒷전으로 미루고만 있었다.


  16개월 무렵 첫 시도 때 나의 양쪽 가슴에 붙인 반창고를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떼어냈다. 얼굴을 찡그리며 ‘엄마 아프다’는 호소도 소용없었다. 현미식초를 발랐다. 시큼한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기어이 빨아보고서야 놀란 걸음으로 달아났다. 자다 깨서는 자연스럽게 품을 파고들어 젖을 물었다가 이내 퍼지는 시큼한 맛에 갖은 짜증을 내며 내 배를 사정없이 꼬집기도 했다. 나는 나대로 참아주려 하다가도 너무 아파 소리를 꽥 질렀다. 결국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나도 따라 울어버렸다. 몸도 마음도 쓰렸다.


  두 번을 실패하고 18개월째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친정에서 엄마의 도움을 받아 시도했다. 밤새도록 아이도 울고 나도 울고, 혼자였다면 절대 견디기 힘들었을 밤이 지나갔다. 친정에서 돌아온 날 아이는 이미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나와 더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안아달라 요구했다. 누적된 피로에 젖몸살까지 겹친 나는 북받치는 마음에 울음이 터졌다. 우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는 내가 아파서 운다 싶었는지 ‘호오’하고 바람을 불어줬다. 그리고 나의 양쪽 가슴에 뽀뽀를 쪽쪽 해줬다. 그날 밤 아이는 한참을 자지 않고 장난만 치더니 슬쩍 내 옷자락을 올렸다. 양쪽에 붙은 반창고를 보고는 체념한 듯 서글픈 웃음만 지었다. 젖을 먹을 때 하던 것처럼 내 배와 배꼽만 만지고 쑤시다가, 그래도 영 아쉬운지 배에 뽀뽀도 했다.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자, 아이는 그제야 잠이 들었다.


  육아의 풍경은 그랬다. 하나하나 세세히 돌아보면 고난의 연속이었다. 나 자신이 매몰되고 오로지 아이들의 엄마로 감내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풍경 바깥으로 나와 돌아보면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내가 없는 시간이었지만 엄마로 오롯이 아이의 모든 세상이었던 날들이니까.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아름답고 그립다.


  노트북을 켠다. 가족사진 폴더에서, 아이에게 엄마가 세상 전부였던 날들을 클릭한다. 한참을 보다 보면 어느새 그리워서 웃고 그리워서 울고 있다. 이제 두 아이는 모두 중학생이 되었고 나는 또다시 사춘기라는 고난의 시간과 마주하고 있다. 때로는 몸서리치게 겪고 싶지 않은 날들을 지나는 중이지만, 어느 다가올 시간에 되처 꺼내보며 나는 그때도 그리움에 울고 웃겠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풍경의 바깥에서 말이다.


젖 물리는 개

                                             문태준


어미 개가 다섯 마리의 강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강아지들 몸이 제법 굵다 젖이 마를 때이다. 그러나 서서 젖을 물리고 있다 마른 젖을 물리고 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정을 뗄 때가 되었다

저 풍경 바깥으로 나오면 저 풍경 속으로는 누구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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