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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게 된 계기 1

- 삼성 지역전문가

by allwriting Mar 20. 2025

첫 직장은 삼성화재였다. 회사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본사에 근무하면서 때맞춰 승진했고 월급도 두툼했다.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나 비로소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사내 연애로 결혼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평범한 회사원 생활에 변화가 생긴 건 ‘지역 전문가’에 발탁되면서였다. 당시 삼성에는 지역 전문가 제도가 있었는데 1년 동안 체류비를 모두 지원하고, 월급도 그대로 나왔다. 가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 나라 어학 자격증을 따고 리포트 하나 제출하면 끝. 

    

이렇게 좋은 제도이니 경쟁이 치열하다. 오죽하면 지역 전문가로 뽑히기 위해 삼성에 입사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내가 뽑혔다. 행선지는 일본.   

   

일본에 도착하고 4개월 동안은 그룹 여러 계열사에서 모인 20명과 함께 일본어를 공부했다. 산속에 있는 기숙사에서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 9시에서 6시까지 공부했다. 풍광이 아름다웠다. 바람에 우수수 눈을 떨구는 대나무를 보며 노천 온천에서 목욕하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휴일이면 다른 친구들은 골프를 배우러 다녔다. 왜 산에 조그만 구멍을 하나 파놓고 거기에 공을 넣으려 애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근교를 여행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걱정 없이 돈을 썼다. 어디를 다녀오던 회사에서 비용 처리를 해주니까.     


4개월이 지나 우리 20명은 기숙사를 떠나 도쿄로 가서 한 달 뒤에 있을 일본어 시험 준비를 했다. 서툰 일본어를 집을 구하려 애먹었다. 나는 가구라자카라는 동네에 있는 ‘히토리 맨션’에 입주했다. 히토리 맨션은 발령이 잦은 일본 회사원을 위한 집이다. 가구가 딸려있고 점심, 저녁을 제공했다. 몸만 들어가면 되니 편해 좋은데 공간이 비좁다. 내가 택한 곳은 8평. 침대에 누우면 화려한 감방에 사는 기분이 든다.   

  

한 달 뒤 치른 시험에서 일본어능력시험 1급에 합격했다. 이제 일본에 와서 해야 할 일은 다했다. 그나마 다리를 움켜쥐고 있던 족쇄까지 풀렸으니 이제 마음껏 놀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합격 발표 다음 날은 오후 3시까지 자면서 군대 말년병장 시절을 떠올렸다. 그 다음날은 오후 1시까지 잤다. 그 다음날은? 아침 7시에 깼다.                                                                              

지금도 바쁘게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일할 때보다 놀 때가 더 힘들었다. 합격한 친구들과 술 마시며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술도 지겨웠다. 한없이 남아도는 시간에 무엇할까 고민하다 등산을 좋아해서 일본의 높은 산을 정복해 보기로 했다. 후지산, 다테야마, 다이산... 높다는 산 3개를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 왔는데. 시간을 이렇게 허비할 수 없어.’  

   

이리저리 바쁘게 문화 탐방을 다녔다. 하루는 우에노에 있는 ‘야한 영화관’에 갔다. 살색으로 도배된 포스터에 5편 동시상영이란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해해주시라. 당시 나는 신혼이었는데 일본에서 독수공방하고 있었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들어가 보니 기대와 같이 살색의 향연과 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에 띄는 빈자리에 잽싸게 앉았다. 한숨을 돌리고 작품을 감상하는데 뒷자리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찬찬히 귀를 기울여봤지만 분명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온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일본은 선진국이라 영화관에서 실제로?’     


온갖 망상이 떠올랐지만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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