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는 일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일어나 슬며시 뒤를 보았다. 거기에 여자는 없고 웬 할아버지가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다. 내가 들었던 야릇한(?) 신음은 그 할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몸이 편치 않은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반도 채워지지 않은 영화관이지만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했다. 5편 동시상영을 보려면 하루는 걸릴 테니까. 도시락을 꺼내 먹는 사람, 술 마시는 사람, 취해서 옆 사람과 싸우는 사람... 여자는 한 명도 없고, 모두 남자, 그것도 나이 든 사람뿐이었다. 도무지 작품을 감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5편 동시상영관에서 반편만 보고 나왔다.
살색으로 가득 찬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의문만 잔뜩 안고 나왔다.
‘왜 영화관에 할아버지들만 있는 걸까?’
‘할아버지들이 왜 야한 영화를 5편씩이나 보는 것일까?’
‘할아버지인데 저런 야한 영화를 보는 이유가 뭘까?’
저녁에 내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대학원생 마루오를 만났다. 나는 한국인답게 솔직하게 야한 영화관에 본 장면을 말하고 질문했다. 왜 야한 영화관에 노인밖에 없냐고? 마루오는 다테마에(겉마음)의 고수 일본인답게 얼굴을 굳히며 되물었다.
“한국에는 야한 영화관이 없어요?”
“있어.”
“거기에 노인이 안 가요?”
“주로 젊은 사람이 가지. 노인은 창피해서 안 가.”
마루오는 회피하려 했지만 나는 집요하게 캐물었고 마침내 대답을 들었다.
마루오에게 들은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일본 대기업은 2년이나 3년이 지나면 전근을 보낸다. 일본이 작은 섬나라 같지만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꽤 길다. 먼 곳으로, 그것도 2, 3년마다 전근을 가는데 가족은 따라갈 수 없다. 전근을 간 회사원은 회사 사택이나 나처럼 히토리 맨션(혼자 사는 집이란 뜻)에 살면서 회사 인간이 된다. - 어쩌면 이걸 노렸을지도 모른다.
주말에도 상사나 동료들과 골프를 치며 지낸다. 그러다 보니 가족과 사이가 서먹해지고 정년퇴직할 때쯤이면 낯선 사람이 된다. 그래서 황혼 이혼도 유행한다. 그나마 부부 사이를 유지해 주던 유일한 끈이 끊겼으니 더 같이 살 이유가 없고 퇴직금 등을 받아 재산 분할도 쉽고.
“그렇게 살벌해? 그래도 부부인데?”
“다 그렇지는 않아요. 퇴사한 남편을 챙기려고 하는 부인도 많아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요.” 마루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왜 쉽지 않은데?”
쉽지 않은 이유는 남편이 회사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회사에 몰두하는 동안 여자는 뭘 했겠는가? 여러 가지 취미 활동을 한다. 한국 학생들이 아이돌을 쫓아다니듯 좋아하는 축구 선수를 따라 전국을 순회하는 여자도 있다. 그래서 일본에는 ‘뱅쿄카이(공부 모임)’ 등 성인을 위한 모임이 많다.
“예를 들어, 스포츠 댄스를 배우는 여자가 남편을 데리고 가도 어울리지 못해요. 남편도 곧 싫증 내고.”
“그래서?”
“5편 동시상영 하는 영화관에 가는 거예요. 그건 남자의 영원한 관심사니까.”
이해했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그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늙은 내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마루오와 헤어지고 생각했다.
‘퇴사하고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먼저 자영업자나 사업가가 떠올랐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장사를 하는 부모님도 내게 절대 가게를 맡기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 7천 원짜리 물건을 팔면서 만 원을 받으면 5천 원을 내주는 내 모습을 본 날 “너는 장사는 하지 마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으로 예술가가 떠올랐다. 작가, 미술가 등 예술가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니까. 그러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지만 나는 어렸을 때 문학 소년이었다. 백일장에서 장원을 받기도 했다. 아내가 스포츠댄스를 추는 동안 원목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모습이 그려졌다. 한번 시작한 상상은 더욱 세차게 날갯짓했다.
‘황석영처럼 유명한 작가가 되면 돈도 많이 벌지 않을까?’
교보문고에 앉아 팬에게 둘러싸여 내가 쓴 책에 사인을 해주는 모습이 보였다. 글은 쓰기도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