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트겐슈타인
일본어로 소설을 쓰면서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는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조차 이해하지 못한 말일지도 모른다. - 세상 모든 언어를 알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저 부족함을 깨달았고, 세계는 넓어졌지만 넓어진 세상에서 나는 방황했다.
버트란트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언어를 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쉽게 말해 숫자 ’1‘처럼 ’나‘라는 말의 정의를 누구에게나 똑같은 개념으로 정의하려 했다.
당신은 ’나‘를 정의할 수 있는가? 나는 정의할 수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이 ’나는 나다‘ 정도지만 여기에 의미의 확장은 없다.
6번째 소설을 쓰고 나서 나는 방황했다. 세상은 넓어서 할 일은 적었고 나는 움츠러들었다. 한국어가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한글‘에서 빨간 줄이 쳐지면 뭔가 맞춤법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이고 사전을 찾아보면 내가 아는 단어가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
발길이, 아니 손가락이 턱턱 막히니 소설을 쓰기도 전에 글이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 나는 한강의 기적을 만든 한국인이자 회사원이다. 7번째 소설과 씨름을 했다. 7번째 소설의 제목은 ’보탄노하나, 모란꽃‘이었다. 일본은 명사와 명사를 붙여서 표현할 때 가운데 ’노 - 우리말의 의‘를 넣는다.
7번째 소설은 내 경험, 최대치로 야하고 야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나는 언어로 세계의 한계를 뚫고 싶었다.
’모란의 꽃‘에는 나와 여자가 등장하지만 여기에 의미는 없다. - 우리는 헤어졌다. ’나‘라는 주인공과 ’여자‘가 부딪히면서 울고, 웃다, 헤어졌을 뿐이다. 앞에서 소설은 ’문제 해결 과정‘이라고 했다. 나는 ’과정‘을 이해했다. 하지만 거기에 ’해결‘은 없었다.
회사원답게 생각했다. ’소설은 과정이야. 해결 방법만 추가하면 돼.‘ 남녀가 사귀다 헤어졌는데 그게 ’옳은가?‘ ’그른가?‘ 아니면 ’제3의 길이 있었나?‘ 7번째 소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소설이 써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 하고 싶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 나는 술을 마셨다. 무지 많이 마셨다.
겨울에 이삿짐을 쌌다. 일본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인사를 왔다. 말과 글은 아니지만 나는 세 사람과 포옹했다.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생각했는데 그 뒤 다시는 보지 못했다. 내게는 기억과 체온, 말과 글만 남았다.
그렇게 원했던 ’지역 전문가‘ 시절이 끝나고 나는 귀국하는 비행기에 탔다.
https://brunch.co.kr/brunchbook/storymk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