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소중한
# 걸어가다.
지난겨울은 유독 길었다. 그리고 길어진 겨울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매일 조급하지 않기 위해서 내 목소리를 조금 낮추기로 했다. 낮은 톤의 소리가 아니었기에 다소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한 걸음씩 긴장해야 하는 날들을 시작했다.
앨리스의 선택과 실행을 응원하기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야 했다.
기다림, 성격 급한 내가 가장 잘할 수 없는 그것. 기다림의 시작이다.
성실함이 가장 큰 장점이자 무기인 나의 앨리스는 묵묵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목표가 뚜렷하지만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운 입시의 긴 터널, 그 입구를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나의 앨리스는 오직 하나뿐인 딸. 장녀이자 막내이고 부모와 주변인들의 기대 그리고 부담을 한껏 끌어안은 채 제 할 일을 한다.
나는 그저 앨리스의 옆자리에 있어준다.
그리고 나지막이 나의 일상을 읊조리며 웃고 앨리스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준다.
온기를 가득 담은 손바닥의 따뜻함을 전달하면서.
# 순서
이른 아침과 늦은 밤 아직은 차가움이 감도는 공기가 겨울옷을 떼지 못 한 앨리스에겐 위안 같을까?.
계절감을 신경 쓰는 나는 앨리스의 기모 티셔츠와 패딩을 간절기 옷으로 바꿔주고 싶을 뿐이다.
행여 답답함에 집중하지 못할까 하는 염려이지만 앨리스는 금방 찾아오는 허기의 소리를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겨울 옷을 벗지 못 한다고 한다.
줄곧 에너지를 쏟아내어 배고픔을 쫓아내느라 애를 쓰고 있는 그녀에게 복도에서나 겨우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를 권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의 앨리스에게 통할 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덜 불편할 옷으로 교체해 주는 수밖에.
원하는 대로 들어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앨리스는 이제 더 이상 십 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 숫자가 바뀐 자녀들이 있는 선배맘들의 이야기들이 지금에서야 와닿는다.
새벽녘 깊이 쓰러져 잠든 앨리스의 머리카락을 편안히 넘겨주면 안쓰러움이 밀려든다.
어느 가정에서나 흔하게 생길 수 있는 장면일 것 같다.
그러기에 그 또한 별일 아니다.
# 소녀
나의 앨리스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범상을 받아온 특이 체질의 학생이다.
반전이랄 것이 있는데 어느 자리에서나 먼저 나서고 활발하며 목소리가 큰 타입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용하고 소극적이며 완벽주의 성향인 탓에 모범적이지만 리더는 아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이후 새 학기가 시작일 땐 "어떻게 친구를 사귀지?"가 늘 앨리스의 단골 고민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살짝 미소를 짓는 방법, 호감의 표시로 사탕 한 개 권해보는 방법, 내 자리를 기준으로 앞, 옆, 뒷자리 친구와 자연스럽게 말을 터 보는 방법 등 구체적으로 상황을 만들어 설명해 주기도 했다.
그 시절을 회상해 보면 전혀 고민스럽지 않았던 나의 경험상 앨리스의 걱정을 덜어주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새 학기를 금방 적응하고 언제 그런 정도의 고민이 있었냐는 듯 친구들과의 원만한 관계로 2학기 상담주간엔 담임 선생님의 교사생활 중 졸업생을 포함하여 이토록 모범적인 학생은 없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앨리스의 노고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접어드는 가장 중요한 시기엔
앨리스 또한 그 겨울 방학에 10킬로그램이 빠지는 수험생 모드에 돌입했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중요한 조언을 실행하느라 요가 매트 한 장을 깔아 두고 온라인을 이용하여 매일 한 시간씩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홈트레이닝을 했다.
땀으로 흥건한 앨리스의 모습은 예비 고3 수험생의 시작을 알렸다.
나도 수험생의 엄마. 그 시작이었다.
# 나의 소중한 두 번째 앨리스
파킨슨 증후군으로 시작된 치매를 앓고 계신 나의 엄마. 이제 80대 초반의 가여운 앨리스.
때로는 밝게, 주로는 부정적으로 흥분한 엄마의 목소리를 핸드폰 너머로 집중한다.
나의 역할은 잘 듣고 큰 소리로 반응하며 아이를 달래주듯이 안정시켜야 한다.
요양보호사의 도움 요청이기도 한 그 전화를 언제든 꼭 받아야 한다.
통화가 되지 않으면 엄마의 불안 증세가 더 야기되어 그 자리에 있을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엄마를 잘 돌봐주지 않을 수 있다는 나의 걱정 반 추측으로 SOS 같은 그 전화를 놓치면 안 된다.
그리고 깊은 하소연을 긴 시간 다정하게 들어주며 반응한다. 그러고 나면 진정이 되어 한결 나아진 상태에 이른다.
앨리스의 심각한 주요 증상은 야간 행동이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계속 무언가를 걱정하고 상상한다.
지독히도 잠이 들지 않고 분 초 단위로 말을 이어간다. 에너지가 상당한 앨리스가 신기하기도 하다.
혹여 기력이 떨어질까 봐 물도 권하고 과일 몇 조각을 입에 넣어드리기도 하지만 소용없다.
알 수 없는 앨리스만의 길고 긴 이야기다.
앞 뒤가 이어지지도 뜻을 알기 힘들어 대답을 해 주기도 어려운 그 긴 문장들을 나는 친절이 담아내어야 한다.
24시간 중 단 몇 십 분도 잠들지 않아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헤매는 앨리스를 남편이자 나의 아버지인 그도 감당하기 어렵다. 아빠는 앨리스보다 두 살이 더 많은 다리가 불편해진 80대 중반의 노인이다.
# 그 끝
엄마의 증상을 겪어가면서 소멸될 인간의 나약함과 죽음을 떠올린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면 아무도 치매 노인으로 생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치료가 가능하고 혹독한 투병 생활을 해야 하는 중병이나 생존율이 심각한 사고를 택하고 싶다.
앨리스의 세상은 가혹하기만 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원칙의 의미를 모른 체 살아가고 있다.
나아질 기미를 모른 체 치매 증상을 약물의 힘으로 붙잡아 느리지만 항해하듯 악화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