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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Mar 17. 2021

극장은 아직 데워지지 않았어

극장종말론자 입문 과정




겨울의 극장 온도는 쉽게 짐작되지 않았다. 오래된 극장이라서일지도 모른다. 무대와 객석이 연결된 한 몸이 거대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을 테다. 그 안을 채운 공기를 나란히 데우는 건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극장 관리자는 대형 히터의 기능이 켜거나 끄거나 둘 중 하나라고 했다. 미리 틀어둔 히터가 한창 뜨거워지기 시작할 무렵 객석이 채워지면 사람들의 온기가 더해진 극장은 내내 더울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미리 히터를 끄고 마침 관객이 평소보다 적다면, 객석은 또 서둘러 식어버린다. 알맞은 온도를 찾다가 끝나버리는 게, 오래된 극장의 겨울이었다.

너는 출연자 대기실 가운데 하나를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뮤지컬 제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극장에서 보내는 두 번째 겨울이었다. 공연마다 매번 극장을 옮기긴 했지만 오래된 극장은 엇비슷했다. 극장에 가면 너는, 대기실을 어떻게 사용할지 계획했다. 에이포 용지에 이름을 출력해 왔다. 배역 이름들, 여자 앙상블, 의상실, 분장실 따위의 분류. 그것은 각 공간 문 옆에 붙었다. 무대와 가장 가까운 대기실은 주연급 배우들이 나눠쓴다. 멀리에 넓은 대기실은 앙상블 배우들이 쓴다. 아래층에 있는 대기실은 분장팀과 의상팀에 배정된다. 너는 무대와 같은 층의 대기실 중 가장 구석에 있는 작은 방을 쓴다. 기술 스태프들의 휴게실이기도 했고 제작사의 사무실이기도 했고 짐을 쌓아 놓는 창고이기도 했다.

그날 너는 영수증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극장으로 밥과 간식을 나르고, 밤을 새워 무대 셋업을 보조하며 소모품을 주문하고, 분장실의 휴지나 클렌징 크림을 사느라 쓴 돈을 정산했다. 한 달 반 남짓 이어질 공연이 시작된 지 이제 일주일 지났다. 창작 초연이라서 일주일 넘게 극장에 들어와서 리허설을 했다. 대관료를 조금 더 썼고 공연은 그만큼 빨리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네가 돌발 상황에 대응하며 바쁘게 뛰어다닐 일도 줄었다는 뜻이다. 무대감독의 관리하에 이제 이 공연도 별 탈 없이 순항할 것이야, 라고 믿으며 너는 공연 시작 네 시간 전에 극장에 도착했다. 분장을 막 시작하거나 준비 중인 배우들이 오갔다. 무대 크루들은 익숙하게 점검을 마치고 있었다. 조연출의 콜에 따라 순서대로 배우들이 무대로 나와 음향 테스트를 했다. 주문한 도시락이 복도 한 켠에 도착하면 틈이 나는 대로 가져다 들 먹었다. 어느새 공연 직전 무대감독과 마지막 점검을 하는 에스엠콜이 들렸다. 너는 괜히 로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렇게 곳곳을 들락거리다가 사무실로 쓰는 그 대기실로 돌아온 것이다.


무대를 중계해주는 티브이 모니터의 음량을 켠 후 영수증 뒷면에 풀을 발랐다. 정산마저 대충 마치면 객석에서 모니터링을 하거나 소대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특별한 업무는 없어 보이는데도 제작팀 스태프의 상시 대기는 필수였다. 무슨 일인가가 생기면 일단 그 일이 벌려놓은 틈을 막아서는 게 너의 주요 업무니까. 그런 게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니 하루쯤 자리를 비우면 보란 듯이 전화가 걸려 오곤 했다.
 
너는 전화벨이 울리면 불안했다. 좋은 일이란 결코 전화로 벌어지지 않는다. 가끔 들르는 연출가나 별로 친하지 않은 조명팀 스태프에게서 온 전화는 대개 시시했다. 도시락이 두어 개 부족하다거나 상비약 가운데 두통약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는 정도다. 웬만하면 그냥 알아서 따로 밥을 사서 먹거나 약국에 갔을 테지. 그러나 그들의 전화는 너 어디 갔냐, 는 질책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따라서 전화를 거는 이유 자체는 전혀 중요치 않다. 제작팀은 공연의 살림을 도맡아 전체적인 관리를 한다고 여기지만 도시락과 두통약 사이에서 실제로 보람을 느낄 만한 건 별로 없었다. 극장의 낯선 공간들을 누비는 일이나 생동하는 공연 제작의 과정을 관찰하는 일이 신비롭게 느껴지는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뜻이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진짜 불안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는 그 사이 네 개의 공연을 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공연도 계약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았다. 계약 진행의 실무를 맡은 너의 전화번호는 그 계약 당사자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전화번호일 것이다. 약속된 날짜에 계약금이 지급되지 않으면 일부는 곧장 전화를 걸어오고 일부는 하루 이틀 뒤에 전화를 걸어왔다. 물론 너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우선 미지급 건에 관해 미리 안내 전화나 문자를 돌렸다. 그건 시간을 조금 벌어 줄 뿐, 해결책이 아니었다. 전화벨이 가져오는 불안의 모양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형 뮤지컬 공연은 그 특성상 초기 비용이 많이 든다. 반면 그것을 회수하는 과정은 지난하다. 그리하여 계약금이 조금씩 늦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 거라고 사무실에서는 이야기되곤 했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자금 계획을 현실적으로 세웠어야 한다. 그게 맞다. 정말 그렇다. 회사가 잘못 한 거다. 너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원망의 화살은 돈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향하곤 했다. 당장 내게 불안을 직접 전송해온 게 그들처럼 보였다. ‘그래도 좀 기다려주면 안 되나?’ ‘내가 영수증을 정리한다는 것을, 허울 좋은 피디님 소리를 듣지만, 그 돈을 주고 말고를 정하는 결정권자가 아니라는 걸 다들 잘 알잖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들. 그러나 아직 그 대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 약속을 지켜주길 바라는 사람들을 두고, 너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너는 한결같이 죄송하다 말했다. 너는 너의 어떤 면을 망가뜨리면서 잘못된 방향을 노려봤다. 심장을 계획보다 빠르게 뛰었다. 우울한 건 아니지만 우울했다. 뉴스에서는 이한빛PD의 죽음을 짧게 전했다.

그 와중에도 공연은 늘 만석이고 성공하고 있고 돈을 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야 했다. 망하고 있고 그래서 계약금 지급이 지연되는 공연을, 사람들은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생각만큼 표가 팔리지 않지만 빈 자리를 그대로 두고 공연할 수는 없다. 표를 구하기 어렵다는 소문이 나야했다. 지인들을 초대하고 모니터링단을 모집했다. 각종 이벤트로 초대권을 받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홍보팀에서는 입소문이 시작되면 표가 팔리기 시작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초대권 비율은 늘어나고 입소문은 나지 않았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매일 만석인 공연이 왜 돈을 주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사태가 극장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된다. 공연은 계속되어야 한다.

너는 전화벨은 무음으로 바꿨다. 방금, 공연이 시작되었다. 극장은 아직 데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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