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h Dec 20. 2021

사과를 thㅏ과라고 말하는 부류

공연 <창의력 학습>에 본인 역할로 등장했던 건 도전1

12월이니까, 한 해를 정리하는 글이나 기획이 곳곳에서 보인다. 올해의 무엇을 꼽는 것은 무척 간편하게 많은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그 가운데, '도전'이란 단어 앞에 멈췄는데, 왜냐하면 너무 많았고 매일매일이 도전이기도 하고, 유난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도 해서다.


올해의 도전을 이야기하려면, 2021년 서울거리예술축제 초청작으로 올린 <창의력 학습>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전에 없는 답을 찾아내는 능력일 창의력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어떻게 학습되고 통용되고 산업화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출발했다. 작업 과정에서는 그런 식의 창의력이 어떤 질문들을 차단하는지, 그리고는 돈이 되거나 혹은 정상적인 창의력만을 선택하는지 공연을 톺아보고 싶어졌다. 쉬울 리 없지. 창의력이라는 소재가 가지고 있는 복잡한 면들 가운데 무엇에 더 집중할지 선택하는 것도 어려웠고 대본을 쓰는 것도 혼란했고 연습 과정도 수없이 비틀댔다. 공연을 올리고 나서야, 다시 잘할 수 있을 텐데... 생각했고.


매년 그래도 작업을 하나씩은 하는데, 이걸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내가 작품을 만드는 매 순간이 도전이니 그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하려는 걸까. 그건 아니다. 작업 과정에서 소소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무거운 스트레스를 감내했던 순간들을 얘기하고 싶다. 그중 하나는, 내가 오디오 중심으로 전개되는 공연에 인 역할로 출연해 대사를 일부(아니 꽤 많이) 감당했다는 점이다.


정확한 발음과 정상성


나는 친구들과 수다 떠는 거 무척 즐기지만, 동시에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발음 때문이다. 나는 노홍철이 비웃음을 사던 그 th 발음을 한다. 치아 교정을 중간에 중단한 철부지 시절 덕분에 발음이 샌다. 사실 나는 내가 발음이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몇 년 전까지도 잘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시옷 발음을 못한다는 것, 영어에서 S와 TH 발음을 제대로 구분해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건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한창이던 광장에서였다.


무슨 대학생 특파원 무슨 그런 것으로 갔던 터라 현지인 인터뷰를 하려고 시도하는데, 관객으로 온 할머니가 보여 말을 붙였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답하기를 거절(아니 무시)하고, 나의 발음을 교정하기 시작했다. 네 발음이 틀렸어. 네 발음은 정확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어. 우린 대화를 이어갈 수 없어. 날 따라 해봐. 쓰. 쓰. 땡큐. 썡큐. 이 할머니 왜 이래... 생각했는데, 그날 오후 숙소에서 이 일화를 공유하며 깨달았다. 나 발음 구린 거 아는데 구린 수준 아니고 그냥 틀린 수준이야? OMG. 왜 나의 영어 선생님은 이걸 중요하게 챙겨 알려주지 않았을까. 애초에 나는 사과를 thㅏ과 라고 발음하는 부류의 아이라서 그냥 대충 넘어간 건가.


나의 상황을 더욱 정확하게 인식한 것은 노홍철이 무한도전에서 매번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본 때였다. 나는 아닌 줄 알았는데 저게 나야? 이거 창피한 거야? 나는 수치스러웠다. 말할 때 시옷이 들어간 단어를 말하는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말하기 자리에 나서는 것을 더 싫어하게 되었고 스크립트를 쓸 때 시옷이 들어간 단어가 있으면 대체할 다른 단어를 찾아본다.  나는 나를 정상적인 발음하기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영어도 안 하기 시작했다. 축제에서 일할 땐 해외팀의 일정과 투어를 어레인지 하는 역할을 맡았던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영어를 못했지만 잘하고 싶은 욕심과 노력을 나름대로 해가던 시절이었는데, 아예 손을 놓았다. 그렇게 오래 돈과 시간을 들였는데 아직도 영어 발음이 이 모양이고 발음 외에도 모든 게 엉터리라면 더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도, 내가 문법적으로 올바른 글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정 교열과 관련된 책도 사보고, 내 문장이 왜 장황하고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고, 어떤 부분이 번역투이고, 어떻게 수정해야 좋은 문장인지 살펴봐도, 막상 쓸 때는 반영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철자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좋은 문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내가 쓴 글들을 읽을 때마다 수치심을 느꼈다. 내 주변에는 특히나 글을 잘 쓰고 출판계나 기자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정확한 글을 쓸 줄 아는 이들은 그들이 작정하지 않아도 글을 읽자마자 훈련이 안된 사람의 글임을 간파할 것이다. 대학원까지 다닌 인간이 문장도 하나 제대로 못 쓴다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잘 들렸다. 그래서 쓰고 싶은 대로 술술 잘(정확히는 막) 쓰던 시절은 막을 내렸다. 나는 최대한 간결하게, 그래서 문장 자체가 아름다워 지려다 구려지는 것을 대신해 간단하고 흠 없는 문장을 쓰려고 애썼다. 글은 그런 노력이라도 할 수 있지만, 발음은 그런 식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나는... 말이 줄었다.


*


그러던 중 김초엽 작가의 북토크 영상을 봤다. 이 똑부러지고 아름다운 작가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성심껏 했다. 눈에 띄는 건 그의 발음이었다. 다들 말하는 정확한 발음은 아니었다. 코로나 이후 팟캐스트 듣는 날이 많아지면서, 발음 좋은 진행자나 게스트들의 대화를 들을 날이 많았고, 그때마다 왜 다들 저렇게 말을 잘하고(말을 하는데 주어술어 딱딱맞아) 발음이 좋을까 감탄하던 시기였다. 김초엽 작가의 말을 들을 때는 그 내용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발음이 좋고 나쁨을 떠나 주어진 자리에 마음을 다하는 모습이 충격이고 감동이었다. 그가 보청기를 사용한다는 점과 귀가 잘 들리지 않으면 발음이 어눌해지고 목소리가 갈라진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발음의 정확도가 청력과 관련이 있기도 하다는 점도 알게 되어서 어쩐지 나는 청력검사도 해보았다(이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는 특수한 상황에 있으니까 나와 다르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지, 발음이 중요한 게 아니지, 태도와 내용이 중요하지,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정확한 발음에의 집착 또한 정상성에 대한 집착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다양성이 중요하고 아름다움은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추종해야 할 정상성의 기준이 확고하게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왜 발음만은 예외라고 여겼을까? 내 발음은 틀린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살아온 과정의 흔적이 담긴 내 발음일 뿐이라고 여기지 못했을까? 각자 조금씩 틀려가며 다른 발음을 하고 다른 형태로 소리를 공유하는 것은 각자가 살아온 지역이나 조건, 환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 텐데 말이다. 내 발음이 새고 말하는 속도가 성급하게 느껴지도록 빠른 것은, 그냥 내 얼굴이 좀 크고 코는 좀 작아가며 이렇게 생긴 것 같이 이렇게 생겨먹은 거라고 여기게 되었다. 갱상도 애린왕자 보라구.... 그것은 스타일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시대지 않은가.


그런 인식과 고민 끝에, 나는 작가 역할로 섭외했던 배우에게는 다른 대사를 맡겼다. (후하) 내 경험을 내가 말하는 식으로 공연에 등장하게 되었다. '숲'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고 자연스럽게 흘리듯 말하려고 하는 걸 보면서 사람은 안 변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 같은 부류의(사과를 thㅏ과라고 말하는 부류) 인간도 당연히 말하고 출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애초에 훈련되지 않은 퍼포머들과 연극을 만들고 싶다고 떠들곤 했으니까. 그러면서 나를 예외로 했던 것은, 견고하고 매끈한 아름다움이 아닌 무엇을 찾겠다고 한 말을 허위로 만드는 것일테니까. 내 발음도 좋아해주자... 도전 하나는 그렇게 지나갔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게 그저 다른 것일 수도 있다고 여기면서. 어쩌면 이런 식으로 나의 창의력도 조금 힘을 얻은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동생이 없는 날 가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