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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딸, 하와이로 떠나다

하와이의 치유 - 여성성과 남성성의 균형을 찾아서

"사정이 좀 복잡해"


사정이 복잡하지 않은 가족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서른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이후로도 좀처럼 힘든 사정과 감정을 잘 털어놓지 못했던 나를 뒤흔드는 사건이 찾아온 것은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작되기 직전의 겨울이었다.  


가장 기뻐야 하는 크리스마스.

하지만 누군가의 탄생을 축하할 겨를도 없이 강렬한 어둠이 들이닥쳤다.


그날 아주 오랜만에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거대한 밀물 같은 슬픔이 나를 집어삼키듯 덮쳐왔다.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모계의 슬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였지만, 

가슴과 두 다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슬픔의 무게는 예상보다 강했고, 나는 심하게 휘청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슬퍼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슬픔이라는 감정에 빠져 울고 있을 여유란 없어. 

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어떻게 하면 빨리 다시 일어나서 산재해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지 고민해. 

그리고 아주 빠른 속도로 해결해 나가. 울지 마! 그만 울어. 슬퍼하는 시간은 사치야.'


정신을 차려보니 2시간이 흘러있었다. 


불가능한 계획들을 세우며 너무나도 가혹하게 나를 몰아붙였더니 2시간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놀랐다.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방식으로 내가 나를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나의 슬픈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던 그 해의 여름에도 장례식장에서 우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던 엄마였다.

엄마가 슬픔을 다루는 방식은 '억제'였다.


그런 엄마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늘 홀로 강하게 살아와야 했던 그녀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곧 인생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적군에게 부드럽고 연약한 목덜미를 내보이는 것이었다. 

슬퍼하고 좌절해도 응원해줄 이가 없었다. 

그래서 강해져야만 했고, 자신의 부드럽고 연약한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쉽게 드러내지 못한 채 커리어우먼으로 살아야 했다. 


그랬던 엄마가 중년이 되었을 때 심하게 무너져 내렸다. 

IMF 이후 어렵게 유지하던 패션 사업을 정리해야 했고, 동시에 몸과 마음에 병이 찾아왔고, 외할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셨고, 아직 대학을 다니는 딸 하나가 남아있었다.


엄마가 나를 대하는 방식, 슬픔을 대하는 방식을 보며 스스로에게 가혹해지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가장 큰 감정적인 위기가 찾아왔을 때 내가 나를 돌보는 방식은 가혹함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삶의 패턴에 전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대물림되어 내려져오는 역사의 반복을 끊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워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녹슨 쇠사슬을 황금으로 바꾸어내는 연금술을 부릴 수 있을까.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나를 돌보자. 혼자서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자.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자.

슬픈 드라마가 아닌 기발한 프로젝트를 만들어 보자.'


가혹함이라는 감정 마비의 덫에서 벗어날 새로운 관점이 필요했다. 


스마트폰을 켜고,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빠르게, 하지만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썼다. 




영혼을 끌어모은 용기였다.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했고, 그 여행 경비를 지인들에게 펀딩을 받기로 한 것이다. 

조건 없는 선물이라는 뜻으로 Gift라고 이름을 붙였다. 

여행지는 하와이 카우아이 섬. 


마침 그곳에서 치유를 위한 워크숍이 열린다는 정보를 얻었고, 그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신혼여행 때만 가는 곳이 하와이는 아니지 않은가. 나를 위해 혼자 하와이로 떠나고 싶었다.

혼자 힘으로는 갈 수가 없었고, 주변에 선물을 요청하기로 했다.  


하지만 취약함, 연약함을 공개적으로 사적 공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에게 내어 보인다는 것이 두려웠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을 아주 재미있는 프로젝트로 만들어서 새로운 역전을 이루어내고 싶었다. 


이 글을 올리고 난 뒤, 삭제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냐고?

당연히 삭제하려고 했다. 그럴 예정이었다.

이 글을 올리고 난 다음, 목욕탕을 가면서 너무나도 부끄러운 마음에 글을 삭제하려고 스마트폰을 켰는데 전원이 꺼져버렸다. 


신이 놓은 한 수인가?


두려움과 수치심에 글을 삭제하려던 마음을 접고, 그냥 용기를 내서 이 글을 계속 게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삭제할 방법이 당장 없었으니깐 말이다. 

복잡한 마음과 생각들은 내려놓고, 일단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그고 쉬기로 했다.


목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스마트폰을 충전했다. 

페이스북에 친구들의 여러 댓글이 달렸고, 메시지와 연락이 와 있었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 마음속의 나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렇게 Gift, 선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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