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꼬실 거니까
2월 3일에 체육관이 문을 닫았으니 배드민턴 못 친 지 한 달하고도 일주일이 넘었다. 내가 바빠서 못 치면 그러려니 하지만 체육관 문을 닫아 못 친다고 생각하면 괜히 좀이 쑤신다. 전국에 배드민턴 동호인이 1천만이라는데 쉽게 실감할 수 있는 숫자도 아닐뿐더러 제대로 된 통계도 아닌 떠도는 설. 동네 뒷산만 가도 라켓 들고 깔짝거리는 친구들은 쉽게 볼 수 있으니 그 정도 될 수도 있겠다, 딱히 거부감이 들지도 않지만.
배드민턴 친다고 하면 그걸 뭘 돈 주고 레슨까지 받냐며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많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주말마다 운동하러 간다 하니 아빠는 마당에 코트를 설치하고 레슨 해줄 테니 집에 붙어있어 있지 않겠냐 진지하게 물었다. 나도 진지하게 되물었다. 내 레슨을? 아빠가?
운전을 배우는 것도 바둑을 배우는 것도 선뜻 가르치겠다 말하긴 쉽지만 끝없는 단련을 필요로 하는 종목인 건 마찬가지다. 레슨비 월 10만 원이란 여타 스포츠 레슨비에 비하면 터무니없게 낮은 금액이지만서도 골프도 아니고 테니스도 아니고 배드민턴을 굳이 돈 주고 배워서 치다니, 라는 인식은 분명 저변에 깔려있는 듯 하다.
한창 초기에 배드민턴에 푹 빠졌었다. 매일같이 내몸뚱아리만한 가방을 들고 출퇴근했다. 모두가 깔끔한 정장 차림에 세련되고 댄디한 옷차림으로 오가는 (엄하디 엄한) 보도국. 영문으로 대문짝만하게 YONEX 가 박힌 가방을 듣고 복도를 휘젓는 나를 사람들은 신기하게 쳐다봤다. 눈에 띌 거란 건 예상해서 조심스러웠지만, 생판 모르는 분이 운동하시냐, 말 걸어올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슨... 운동하세요?"
"네, 배드민턴 쳐요."
"어디서요?"
"홍대에 뒷산에 동호인 클럽이 하나 있는데..."
라는 식의 대화를 수많은 사람들과 수도 없이 주고받았지만 같은 사람을 또 마주쳤을 때도 영락없이 날아온 질문은 한결같았다. "오, 오늘은 테니스 가는 날이세요?"
끊임없는 도돌이표. 아니요... 배드민턴 쳐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되냐.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은 배드민턴이라는 건 저렇게까지 열정적으로 하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인식. 그게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개중에 몇 몇 지인은 배드민턴을 우습게 보고 동네 체육관을 찾았다 된통 당하고 오기도 했다. 가령 친구랑 겸사겸사 배드민턴 치러 갔는데, 저쪽에서 다가온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한 게임 하실래요? 말을 걸어왔단다. 연세도 있으신 것 같은데 좀 봐드려서 살살 쳐야지 했단다. 코트에 들어가는 순간 후회했단다. 저 어르신보다 발이 빨라도 내가 빠르고 힘이 세도 내가 셀 텐데. 나는 온몸에 땀이 나기 시작하는데 저분들은 인자하게 웃으며 공을 이리저리 날린다. 저들은 땀이 나지 않는다. 십여분간 코트 이쪽에서 저쪽까지 끌려다니다 넉다운이 됐단다. 그렇겠지, 실금실금 웃으며 대답하자 "그분들 장난아니더라" 말한다. 그 장난아님은 구력에서 나온 기술일 거다.
내가 배드민턴에 빠져있는 걸 보고 "장담하는데 내가 너는 왼손으로 쳐도 이긴다"며 장담 같지도 않은 호언장담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배드민턴 세계에선 쪼랩 of the 쪼랩이지만 그래도 라켓 한 번 안 잡아본 사람은 이길 수 있단 생각에 "덤비라"고 도발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코트에 드러눕는다. 그럼에도 여자인 내게 진 게 분한지 구구절절한 이유가 따라 붙인다. "아, 어제 술만 안 마셨어도" "아 신발이 좀 편한 거였으면" "아 너처럼 좋은 라켓으로 치면 이기는데" "야 담번에 또 붙어"
소개팅하는 남녀가 어디사세요? 무슨 영화 좋아하세요? 물어보듯 배드민턴 동호인들에게도 나름의 통성명이 있다. 구력이 어떻게 되세요? 급수가 뭐예요? 어디서 치세요? 사는 동네보다 상대방의 이름보다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보다 우리에겐 훨씬 더 궁금하고 중요한 것.
구력이라는 건 급수와 더불어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치가 되기도 한다. 배드민턴 구력이 1~2년 정도라면 특수한 환경이 아닌 이상 (어렸을 때 쳤다거나 체대생에 삼시세끼 먹고 배드민턴만 쳐온 환경) 보통 D조다. 여기서 꾸준히 레슨을 받고 대회를 나가 경험을 쌓다가 승급이 인정되는 (구, 시 등 지자체 주관) 대회에 나가면 C조로 등극한다. 승급이 인정되는 기준도 동네마다 다르다. 출전한 팀 수가 10팀이면 우승팀만 승급, 10팀 이상이면 2등까지 승급. OO구는 세고, OO구는 약하고. 끝이 없는 그들만의 선별법이 있다. 처음엔 뭐 그런 게 다 있다냐, 참말로 복잡하다, 싶었다.
배드민턴은 A조부터 D조 (최근엔 배드민턴 인구가 늘어나면서 E조와 초심조도 생겼다)까지 있는데 피라미드형태기 때문에 D조에서 C조 올라가는 게 가장 힘들다고들 한다. 그다음부터 불이 붙으면 A조까지 쑥쑥 올라간다는데 글쎄, 그건 경험해보지 못했으므로 언급은 패스. 대회는 연령대별로 진행되는데 보통 20대와 30대를 하나로 묶는다. 20대 초반인 팀과 30대 후반인 팀이 D조에서 붙으면 양팀 모두 긴장한다. 20대의 젊은 파워와 순발력이 있지만 30대가 가진 연륜과 구력 또한 무시를 못하기 때문이다. 세기의 대결을 펼친다. 승급 대회장에서 동호인들은 사활을 건다.
급수가 대수냐 콧방귀 뀌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 풀러 배드민턴치러 가는데 굳이 거기서도 스트레스를 받아오냐는 거다. 일리 있다. 일요일은 교회에 나가야 해서 대회출전을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적당한 파트너가 없어 대회를 매번 놓치는 경우도. 그냥 내키지 않아서 안 나가는 사람도 많다. 구력은 10년인데 급수를 물었을 때 D조라 대답하는 그런 그들은 묵은 D조라 부른다. 승급을 안 했을뿐 숨은 무림의 고수일 수 있단 뜻이다. 급수와 구력을 같이 물어 실력을 가늠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실력은 또 왜 그렇게 중요하냐. 배드민턴 좀 칩니다, 했을 때 A조예요. 하는 것과 D조예요 하는 것은 다르다. 거짓말 좀 보태서 말하면 쳐다보는 눈빛부터 달라진다. 수없이 고배를 마시고 피라미드의 최상위계층까지 올라간 A조를 우러러봄과 동시에 D조는 어딜 가도 많으니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힘들다. 예쁘장한 여자들을 꼬시려면 배드민턴을 잘쳐야된다는 흔하고 뻔한 설도 아직까지 통한다. 그러니 24평 크기되는 작은 코트 안에서는 A조가 법이요 법관이요 대통령인 것이다. 그런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게 참 지겹기도 하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구기 종목 중에서도 공 날아가는 속도가 가장 빠른 게 배드민턴이다. 그만큼 순간적이라 순발력을 요하는 운동.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중독성이 강한 운동. 대한민국에선 그렇게 불륜커플 많다고 소문난 운동. 80세 할아버지가 20대 젊은이를 이길 수 있는 반전의 운동. 그까이꺼 운동도 아니라고 비웃음 당하기도 하는 운동. 우습게 보고 과음하다가 구급차에 실려가기도, 멋모르고 휘두른 라켓에 실명위기까지 처하는 위험한 운동.
이 운동에 빠진지 이제 햇수로 5년이 되어간다. 어차피 승급하긴 글렀고 어차피 나이 먹어서도 오래오래 할 운동이다. 그냥 조용히 배드민턴만 치고 지냈으면 진작에 승급했겠지만 난 배드민턴이라는 매개체로 참도 다양한 경험을 해왔다. 한동안 체육관에 발들일은 없을 듯 하니 간단하게 배드민턴에 대한 썰을 풀어보겠음. 20편짜리 배드민턴 에피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