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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Apr 20. 2024

프로 불편러와 식당 주인의 공생 관계

어느 주말 오후였다. 카카오톡으로 사진이 도착했다. 우리 집 담벼락을 찍은 것이었다. 담벼락엔 현수막 장이 붙어있었다. 시커멓고 커다란 검은색 폰트로 '가정집 절대 금연'이란 문장 아래, 작지만 시뻘건 색으로 '위반 시 과태료 10만 원이 부과될 있다'는 내용과 '흡연은 맞은편 흡연구역에서 해달라'는 내용이 새겨진 현수막이었다. 앞집 식당 주인이 보내온 사진이었다. 숱한 시간, 막무가내로 그 집 손님들이 담벼락에 와서 담배를 피워댔고, 나는 보건소와 식당 주인에게 번갈아 흡연에 대한 민원을 넣어왔다. 대답이었다. 


사진을 보고 드는 감정은 양가적이었다. 현수막을 붙여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었을뿐더러 쓰여있는 문구나 디자인, 색,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면 그가 애쓴 흔적이 묻어났다. 이렇다 할 설명 하나 없이 사진만 달랑 보내왔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본인도 할 만큼 했다는 걸 그는 무언으로 나타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식당과 우리 집의 흡연 역사는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부부가 운영하던 작은 구멍가게였던 주택이 어느 날 갑자기 식당으로 둔갑했다. '할머니'가 '뒤뜰에서 아침까지 뛰어놀던 토종닭'을 잡아 맛있는 탕을 끓여준다는 콘셉트였다. 실로 식당의 주방엔 동남아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근무를 하고 있고, 아침까지 뛰어놀던 토종닭 대신 오전 11시면 통닭 배송 업체 차량이 찾아온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맛있는 집이 코앞에 있다면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없거늘 문제는 식당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교외 지역에 위치한 탓일까, 그네들은 서울에서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마치 산 속이라도 와있는 듯 온갖 추태를 벌였다. 그네들이 하루종일 피워대는 담배꽁초는 매일 밤 대문 앞에 수북이 쌓였다. 꽁초에 가래침은 기본이었다. 마시고 남은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 그 안에 털어 넣는 담뱃재, 때때로 흘러내린 커피가 담벼락에 달라붙고 그 위를 수많은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것. 바로 옆에 화장실을 두고 구태여 우리 집 대문 앞까지 걸어와 바지 지퍼를 내리고 노상방뇨를 한다는 것.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에도 아랑곳 않고 고성방가를 한다는 것. 때때로 블루투스 스피커를 가져와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는 것. 취객이 운전대를 잡고 후진하다 우리 집 담벼락을 들이받아 한 달 내내 공사를 해야 했다는 것. 시도 때도 흘러들어오는 담배연기로, 코로나 시대에도 재택근무를 마음 편히 할 수 없었다는 것. 그때마다 밖으로 나가 '선생님, 흡연구역이 저쪽에 따로 있습니다만'을 시전해야 했다는 것. 어쩌다 대문 앞에 누군가 한가득 쏟아놓은 토사물을 치우는 날이면 모든 인류에게 가졌던 사랑과 애정이 분노와 혐오로 싹 바뀌었고, 내 입 속엔 온갖 동물 새끼들이 난무하곤 했다. 그러한 이유들로 나는 식당도, 주인존재도 달갑지 않았다. 잘못은 그네들에게 없을지언정 원흉은 그들의 몫이라 생각했기에. 

그러니 식당이 생긴 이래로 고성방가, 음주운전, 흡연, 소음이란 단어들은 줄곧 우리 집 식구들의 화두였다. 나날이 예민해졌다. 조금만 담배 연기가 흘러 들어와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쩌다 집에 있는 날이면 온종일 후각과 청각이 곤두서있었다. 여차하면 달려 나가 싸울 기세로 지낸 세월이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겼다. 그 사이 나는 매년 바뀌는 보건소 담당자와 '금연구역으로 지정이 되지 않은 지역의 흡연 문제'에 대해 끝없는 토론을 펼쳐야 했다. 때때로 그들은 '너무도 공감'한다며 현수막과 흡연 자제 안내문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어느덧 노부부는 나이가 들었고, 경영권을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딸에게 물려주었다. 그가 공식적으로 '사장'이 된 날,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동안 너무 힘들지 않았냐는 화해의 제스처였다. 그의 손엔 닭볶음탕이 한솥 들려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코앞에 닭볶음탕 맛집을 두고도 한 번을 먹어보지 않았다. 그저 싫고, 그저 미운 존재였기에. '할머니'가 만들지 않는다는 것도 '뛰어놀던 토종닭'이 아닌 '냉동닭'이라는 것도.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는 생각보다 붙임성이 뛰어났다. 성격도 서글서글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발상에 기초한 친절을 스스럼없이 건네왔다. 가령 예쁜 꽃 씨가 생기면 나누어준다던가, 솔선수범하여 집 앞의 꽁초들을 청소해 준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그와 나는 연락처를 교환했다. 안면을 트고 나니 보건소에 직접 민원을 넣는 일이 줄었다. 밤늦도록 고성방가가 이어지거나 산책 나가는 길에 노상방뇨하는 자를 목격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방 안에 앉아 책을 읽다가 담배 연기를 맡게 되면 슬리퍼 신고 싸울 태세로 나가는 대신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때마다 그는 '죄송하다'를 연발하며 우리 집에 먹거리를 들고 오기 시작했다. 조리용 냄비째 들고 오는가 하면 바삭바삭 갓 구운 부침개를 들고 왔다. 동네 빵집이 새로 생겼는데, 맛이 있었다며 한 봉지 사 오는 날도 있었다. 이쯤 되니 간식이나 노리는 악덕 이웃이 된 것 같아 때때로 뻘쭘함도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꿋꿋하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추태를 부리는 손님이 없는 날이면 비교적 우리들의 관계는 평화로웠다. 은사님께 드릴 요리를 주문하러 가너나 친구를 불러와 닭볶음탕을 먹으러 가는 일이 생겼다. 종종 가족들과 식사하기 전, 요리를 포장하러 찾기도 했다. 비로소 맛이 느껴졌다. 이래서 인기가 있구나, 이래서 손님들 발길이 끊기지 않는구나. 그제야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만들지 않으면 어떠하랴. '아침까지 뛰어놀던 토종닭' 대신 '냉동닭'이면 좀 어떠하랴. 무엇보다 그네들의 영업이 성행할 때마다 더 이상 가시 돋친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게 되어 좋았다. 장사가 잘 되면 그 또한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흡연과 고성방가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1~2주일씩 걸리는 보건소와 달리 그에게 연락하면 신속하게 처리됐다.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지만, 흡연 문제만큼은 여전했다. 평일 대낮에도 닭볶음탕을 먹으러 교외 지역을 찾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 것인지. 재택이 늘어난 요즘, 창문을 도저히 열 수 없을 정도로 연기가 심했던 날. 나는 그에게 카카오톡을 하나 남겼다. 부디 제발 손님들에게 흡연구역을 안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또 한 차례 사과를 건네왔다. 사진을 보내온 건 그로부터 몇 주 지난 시점이었다. 


사진이 달갑지 않았던 이유는 있었다. 집 앞에 현수막을 붙인다는 건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언정 매일 낯선 타인들에게 집이 노출되는 사람들에겐 조금 다른 문제였다. 현수막에 적힌 문구는 곧 내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다'는 진부한 문구가 차라리 나았다. '개새끼들, 담배 좀 그만 펴'와 같은 과격한 문구를 붙일 수 없는 이유였다. 흡연자들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괜한 시비가 걸리는 일도 지양하고 싶었다. 어떻게 문구를 써야 좀 더 위트 있게 흡연자들을 흡연구역으로 보낼 수 있을까. 오래 고민한 까닭이었다. 


그런 나의 고민을 그가 알 턱 없었다. 그는 사전에 단 한 마디의 협의 없이 대문짝만 한 현수막을 두 장이나 제작해 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에 못으로 박아두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다소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사진을 보내온 것이었다. '깔끔하고, 눈에 확 들어오지 않냐'던 그의 말과 달리 내 눈에 현수막은 원시적이고, 강압적이고, 투박하다 못해 못생겨 보였다. 그가 적은 '맞은편 흡연구역'도 틀린 말이었다. 맞은편엔 흡연구역이 없었다. 이왕 안내를 할 거란다면 제대로 해주어야 통할 텐데, 어디에도 흡연구역을 제대로 안내하지 않으니 그곳을 벗어난 흡연자는 또 다른 타인의 집 담벼락 아래에서 담배를 피워댈 게 분명했다. 과태료 10만 원이 부과된다, 는 문구도 내심 걸렸다. 모르는 사람이야 모르고 지나가겠지만, 일반 주택가 골목의 경우 금연구역으로 지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니 엄밀히 살펴보면 허풍이자 얄팍한 협박이자 거짓말인 셈인데, 그런 거짓부렁을 대문짝만 한 글씨로 써붙인다는 것 자체가 썩 내키지 않았다. 


고민 끝에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말을 우회적으로 건넸다. 집 앞에 문구를 써붙이는 것은 지양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에겐 닿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 경각심이 생긴다'는 말로 일갈할 뿐이었다. 곧이어 덧붙여온 말은 '일단 돈이 6만 원 들어갔다'는 내용이었다. 사비 들여 제작한 현수막이니 딴지 걸지 말고, 효과를 지켜보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대신 어떠한 대응도 직접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생기든 전화를 주면 바로 달려오겠다는 약속을 건네왔다. 

그런 그의 말에서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절감했다. 그에겐 최선이었고 최상의 해결책이었다. 사전 협의도 없이 남의 집 담벼락에 현수막을 붙여도 되느냐, 는 말은 그에게 딴지에 불과했다. 잘못된 흡연구역 안내문 역시 그에겐 안중에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현수막이 투박하고 못생겨서 걸기 싫다는 말 따위 들리지 않을 게 뻔했다. 무엇보다 그의 딴엔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현수막이었다. 분명 본인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화도 났을 것이다. 바쁜 와중에도 번거롭게 문구를 고민하고, 제작 주문을 넣고, 완성된 걸 픽업하러 다녀오면서. 숱한 순간 밀려오는 짜증을 덮어두고 붙였을 현수막이다. 그러니 내가 그에게 건넬 수 있는 건 호응과 칭찬, 인정이었다. 내가 가진 상식, 사고, 일의 질서나 배려 따윈 그저 나만이 가진 세상일 뿐 그의 것은 아니었기에. 


아껴두었던 마스크팩 뭉치를 들고 찾아갔다. 일본 출장길에 사 온 것이었다. 그는 놀라는 눈치였다. 분명 아까 전만 해도 달갑지 않은 듯한 답장을 보내와놓고 다시 생글생글 웃는 낯이니 놀랄 만도 했다. 선물이랍시고 건네는 선물 꾸러미를 보고는 또 한 번 놀랐다. 제작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신경 써주어 고맙다고 말해보았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러자 그는 '안 그래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 왔던 것'인데 '이제야 만들게 되어 미안하다'며 '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이겠지만, 문구를 직접 쓰고 고민해서 제작하고 또 바쁜데 직접 가지러 갔다 와야 했다'라고 묵혀둔 감정을 쏟아냈다.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만큼 노력했어요, 잘했지요?라는 말은 비단 부하가 상사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학생이 교사에게, 바라는 마음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성에 차지 않는다 한들 과정을 바라봐주길 바라는 마음, 부정보단 긍정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역시 누구보다도 흡연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사람일 것이다. 나나 우리 식구들 못지않게. 매번 크고 작은 불편함이 발생할 때마다 맡겨놓은 사람처럼 그를 찾는 나였다. 취객들을 향한 분노를 그에게 쏟아냈던 역시 나였다. 보려고 하니 비로소 보였다.   


그렇게 여전히 삐걱거리면서도 그와 나의 관계는 용케 이어지고 있다. 살다 보면 또 문제가 생기겠지. 그때마다 가진 인류애를 재고할 것이고, 식당 주인에 대한 신뢰를 가늠할 것이며 통화 버튼을 눌러야 할까 고민하는 나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관계가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한다. 그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끼니를 내놓는 업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제 발로 흡연구역을 찾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가길 바란다. 그렇게 그와 나의 관계도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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