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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지내고 있어. 어쩌면 가장 좋은 날은 내가 뭘 하고 사는지 뭘 잘못하고 사는지 뭘 기다리며 사는지 자문하지 않는 날인 것 같아. 내가 글을 쓰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 '효인이가 가장 좋은 날들을 살아가고 있네'라고 생각하면 돼.
한 달 전 작은 아이가 수능시험을 봤어. 그날 난 난생처음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학교 교문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어. 15분가량 일찍 도착했는데 이미 교문 앞에는 수많은 부모들이 발을 동동거리며 서성이고 있었지. 마침내 시험이 끝나고 아이들이 하나둘 교문을 나오자 거대한 빙하 위에 새까맣게 모여있는 북극 펭귄들이 떠올랐어. 먹거리를 찾아 먼바다로 나갔던 어미들이 빙하 위로 올라오면 수많은 아기 펭귄들이 우르르 몰려가 우리 엄마인가 기웃기웃하던 풍경 말이야. 학교교문 앞 풍경은 어미와 새끼의 위치만 다를 뿐 똑같았지.
부모들이 하나씩 나오는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자기 아이가 맞으면 두 팔을 벌리고 아니면 재빨리 다음 아이들의 얼굴을 스캔했어. 아이를 맞이하는 부모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수고했어'였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지. 어떤 아이는 엄마얼굴을 보자마자 '엄마~ 망했어!" 하며 울음을 터트리고 또 어떤 아이는 '배고파!' 하며 엄마 품에 안겼어.
우리 딸은 어떤 표정으로 나올까 궁금해하며 나 역시 발 뒤꿈치를 들고 펭귄처럼 연신 몸을 기웃거렸어. 실은 아이가 시험을 치다 못 견디고 '중간에 학교를 나왔으면 어떡하지. 중간에 나와도 괜찮은데... 정말 괜찮은데 연락 없이 어디로 사라졌으면 어떡하지'라는 마음이 20% 정도 있어서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어.
시험이 끝난 지 30분이 넘어갈 때쯤 우리 딸이 보였어. 나는 막 손을 흔들고 팔짝팔짝 뛰며 딸 이름을 막 불렀어. 아들 같았으면 창피하다고 오다가도 도망갔을 텐데... 우리 딸은 나와 똑같이 막 손을 흔들고 엄마엄마하며 뛰어와 주었어. 가볍게 포옹하는 동안 나는 터질듯한 울음을 간신히 참았어. 딸은 태연하게 시험 시작 전에 선생님께 맡겼던 핸드폰을 돌려받느라 늦었다 했어.
수능시험 전날밤 나와 남편은 각오를 다졌어. 수능 날 아침 작은애가 시험을 안 보겠다 해도 우리 속상해하지 말자고. 고3 내내 단 한 번도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수능시험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서로를 다독였지. 지나가던 큰 애가 그 말을 듣고 한 마디 했어. ‘내년에 재수라도 하게 된다면 올해 수능시험을 경험해 보는 게 도움이 될텐데…‘라면서 말이야.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작은 아이에게 큰 애의 말을 전해주며 어떻게 버텼는지 물어보았지. 작은 애는 단 한 번도 수능시험을 안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했어. 올해는 대학을 지원할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시험지가 눈앞에 있어도 문제가 잘 읽혔다고도 했어. 마음의 꺼풀이 이렇게 쉽게 벗겨진다고?
공부를 안 한 게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못했던 아이에게 수능시험이란 관문이 오히려 수월해져서 나는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렸지.
이로서 나와 남편은 두 아이 모두 성인으로 성장시켰어. 이젠 아이들의 삶은 각자의 의지대로 흘러가겠지. 부자가 되고 싶으면 돈을 벌테고 알고 싶은 게 생기면 공부하겠지.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뭐라도 하겠지. 부모의 책임이 끝나고 이젠 지켜보고 응원하는 일만 남았는데 그건 우리 부부가 가장 잘하는 일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어!
수능시험이 끝난 그 주의 토요일, 서너 달 전에 예약한 차를 인도받으러 광양 이케아에 갔어. 작년부터 거의 10년이 다 된 차에 빗물이 새기 시작했어. 회사가 가까워 차로 출퇴근하던 남편이 차를 사야겠다고 한 건 올해 초였어.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차를 살 돈이 없는 거야. 그렇게 두어 차례 차를 산다 만다 고민하던 남편에게 아주 좋은 조건의 이직오퍼가 들어왔어. 7월 어느 날 남편은 회사동료들과 담배를 피우다 확 질러버렸지.
T사의 전기차로.
예약한 차들은 이케아 주차장 한편에 주차되어 있었어. 우리 차를 찾아 구청에서 미리 발급받은 파란색 번호판을 부착하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새하얀 솜털 같은 눈이 포실포실 앞유리창에 내려앉았어. 이 차는 천정도 유리라 조수석에 앉은 나는 의자를 한껏 뒤로 젖혀 몸을 누이고 청명한 하늘과 살랑살랑 춤추는 눈발을 만끽하다 순간 행복이란 단어가 눈앞을 지나가는 걸 보았어.
돈으로 행복을 산다는 말이 이거구나!
휴직을 앞둔 나는 그동안 사고 싶었던 이쁜 것들을 마구 샀어. 비싸지 않지만 실용적이지 않아 평소의 나라면 눈길도 안 주던 옷과 신발, 가방 같은 거... 벨벳 소재의 츄리닝 바지, 어디 가도 확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핑크색 모헤어 점퍼, 새빨간 니트 머플러와 세트인 손가방, 꽃자수가 새겨진 어그슬리퍼 등 카드값이 걱정되지만 작은 애랑 같이 입고 신고 메고 할 거니까 괜찮아. 하하!
주말이 되면 남편은 어디 가고 싶은데 없냐고 물어봐. 나는 새로 장만한 옷과 신발을 장착하고 차에 오르지.
지지 지난주 주말엔 김장을 하러 30분 거리의 시어머니댁에 갔고, 지지난주는 40분을 달려 백운호수에서 차를 마시고 롯데 프리미엄 아웃렛 매장을 한 바퀴 돌았어. 지난주는 4 시간을 내달려 친정에 다녀왔지. 그러고 나서 남편은 독감에 걸려 버렸어. 그런데도 이번주는 강릉을 가자네.
평소 6시 퇴근 후 다음 날 출근 전까지 주욱~ 안방에 앉아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던 그에게 엄청 무리한 일정이었던 거지. 나 역시 딸의 취향이 1도 반영되지 않은 사고 싶은 것들을 다 사고 나니 ‘괜찮아’했던 카드값에 슬슬 걱정이 되어 와.
그동안 참아왔던 게 봇물 터지듯 터져버린 것 같아. 그리고 그것을 허겁지겁 먹고 체한 상태가 지금이고. 여유는 여유로울 때 즐길 수 있는 건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누려보지 못한 돈과 시간과 마음에 우린 너무 조급했나 봐. 차차 익숙해지겠지.
그런 날들 속에 오늘도 잘 지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