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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May 12. 2024

1924년생 말괄량이

2405121008

일주일의 한 번은 글다운 글을 쓰자는 생각이 어느새 다짐으로 자리 잡았다.  틈틈이 글감을 모으고 집안일을 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뼈대를 세워보곤 하는데 이번 주는 도통 진득하게 한 주제에 집중하지 못했다. 몇 주째 두 달 전 돌아가신 1924년생 우리 할머니에 대한 글이 좀처럼 쓰이지 않아서일 테다. 안 쓰이는 글은 시간을 묵힌 뒤 다시 들여다보면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할머니에 대한 글은 그렇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웬만하면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라 이번엔 꽤나 아쉬웠다. 그럼에도 자꾸만 눈에 밟혀 다른 글을 쓰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머무는 모든 곳에 할머니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를 닮았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 행동, 말투 이 모든 게 할머니를 닮았다. 어떤 상황에도 나의 안위를 우선시하고, 내 것이 된 것은 절대로 빼기지 않으려 가자미눈으로 사방을 살피며 조금이라도 불편한 건 참아내지 못하고 타인의 충고 내지는 조언을 귀 담아 듣기 싫어한다. 내 감정이 내키는 대로 말하고 쉽사리 감정에 휘둘려 분노가 차면 위아래가 보이지 않는 나는 참 불편한 사람이다. 내가 가진 이 무수한 불편함은 소종가의 종부셨던 할머니의 것이기도 해서 한평생 엄마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지 못하셨다.


그럼에도 나와 닮아서 그러셨을까? 나는 할머니에게 참 많은 이쁨과 보호를 받았다. 규칙과 품행단정이 모토인 엄마 몰래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종종 시장에 갔다. 극강의 단짠을 품고 있는 길거리 음식이나 새빨갛고 샛노란 불량식품을 뿌연 흙바람을 맞으며 같이 먹었다. 팔이 아파 도저히 숙제를 못하겠다며 징징거리다 엄마한테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이 나면 할머니는 슬쩍 내 곁으로 다가와 할머니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곤 숨겨둔 불량식품 하나를 내 입에 넣어주셨다. 할머니는 하루 세 번 2시간씩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하셨다. 깜깜한 밤이 무서워 새벽녘까지 잠 못 이룰 때 할머니의 첫 기도소리와 향내가 은은하게 방문 틈으로 흘러 들어오면 그제야 나는 폭신한 구름 속에 안긴 듯 스르르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학창 시절 단 한 번도 지각한 적 없었으니 할머니의 기도는 내가 무한히 보호받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든든한 로얄제리 내지 홍삼과 같았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던 어느 밤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시켜달라고 떼쓰던 내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못하던 어두운 표정의 엄마와 달리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시켜줄게!'라면서 내 손을 잡아주셨다. 나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내겐 이 사람 아니면 평생 결혼을 못할 것 같다는 불안과 사랑에 눈먼 열망에 사로잡혀 아무런  힘도 없던 할머니의 공갈희망이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남들에겐 참으로 불편한 할머니였는데 내게만은 한없이 든든했던 할머니를 기록하는 일은 마치 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기록하는 일인 양 자꾸만 양가적 감정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 이후 나의 일상 모든 곳에 할머니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싼 돈을 주고 싼 티셔츠의 소매가 길어 불편하다며 툭 잘라버리곤 태를 잃어버린 티셔츠를 잠옷으로 입고 있는 내 모습에서, 내 생각에 빠져 괜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심통을 부리고 심심하다 싶다가도 누가 말을 걸면 이내 거리를 두고 멀어지라고 소리치는 나를 뒤늦게 알아챘을 때 나는 할머니의 현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핑계다.


슬펐다. 할머니를 닮아서 살아생전 더 잘해드리지 못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1924년생 할머니가 일제강점기, 광복, 625 사변 등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격변의 한 세기를 살아내면서, 수없이 날아오는 외부의 칼날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불편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연유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1974년에 태어났더라면 조금은 여유로운 집안에서 어쩔 수 없이 교육을 받고 또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공감능력을 조금은 빨리 배워 1924년생이 몰랐을 세상의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지 않았을까해서.




다음은 내가 알고 있는 1924년생 할머니의 일대기다.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인 듯 싶다.    


7남매의 맏딸인 할머니가 10살 남짓한 어린아이였을 때 일이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셨다. 급기야 빗자루로 때려가며 배우게 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할머닌 산으로 들로 그렇게 도망 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배우지 않고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느냐?' 며 속상해하는 할머니의 어머니 말씀에도 어린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따위 거' 알고 싶지도 배우고 싶지도 않다고 큰소리치셨다. 결국 한글도 떼지 못한 채 20살이 되던 해, 소종가의 큰집으로 시집오게 된 할머니는 주구장창 밥만 하시다 50세 젊은 나이에 며느리(우리 엄마)를 얻었다.


참하고 똑똑한 엄마는 눈치도 몸놀림도 재빨라 집안의 대소사를 야무지게 해냈다. 시집온 지 1년도 채 안돼 엄마는 집안 어른들뿐만 아니라 일가친척들의 칭찬을 독차지했다. 할머니는 그런 엄마에게 모든 집안일을 떠넘기고 손을 떼셨다. 그 후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께서 차례로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되셨다. 그때 연세가 56세.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진 할머니는 사랑방 어른들이 즐겨하셨던 담배를 한 손에 물고 봄 여름엔 과수원에서 사과농사를 짓다가 겨울이 되면 우리 집에 오셨다. 내킬 때마다 삼촌과 고모네 그리고 친정 동생네를 다녀오시거나 전국에 산재된 유명 사찰을 찾아 유랑하셨다. 그리고 틈틈이 엄마와 할머니의 어머니한테서 글을 배우셨다. 70세 이후엔 관절염과 천식으로 더 이상 다니시는 게 어려워지자 담배를 끊고 과수원에 딸린 시골집 사랑방에 앉아 온종일 기도를 하셨다. 그로부터 5년 후 엄마와 아버지가 귀향해서 할머니를 모셨다.

 

할머니가 마지막 가시는 길을 엄마와 아버지가 지키셨다. 고관절 골절로 인해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신 지 여섯 해가 되는 날이었다. 저녁식사까지 맛있게 다 드셨을 만큼 아무런 징조가 없던 밤 8시.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엄마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으셨던 할머니는 급하게 병원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엄마의 손을 잡고  '그동안 참 감사했다'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셨다.


2024년 3월 2일, 말괄량이 우리 할머니는 향년 100세의 일기로 별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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